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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산박 Aug 10. 2022

네 어머니는 그래도 국가공무원이다.

외식과 마을회관 식사


아버지 친구, 종근이라는 분. 꼭 만나보고 싶다.

그분은 늘 아버지에게 전화해서 점심을 먹자고 약속을 잡는 어르신이었다. 일주일에 꼭 한 번은 그분이 아버지를 챙기며 점심을 함께 하신 것 같았다. 유일한 점심 친구였다. 시골에서 농사일만 하셔서 외식은 자주 안 하시는 걸로 알았는데, 의외로 종근이라는 친구분 때문에 외식을 자주 하신 것 같다. 어머님만 외식과는 상관없이 혼자서 집이나 마을회관에서 드신 것 같았다.

함께 외식을 하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는 어머님을 너무 홀대하셨다는 생각을 지울  없다. 어머님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시골 내려가서 한번 여쭤봐야겠다. 어머님은 대신 마을회관 다니시면서 거기서 식사도 하시고 식사 당번도 하셨다고 한다. 다행국가에서 노인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여러 노력들을   같다. 마을회관에서 노인들에게 밥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일자리로 취급하여  달에 얼마씩 월급을 주었다고 하니. 큰돈은 아니지만, 전에 어머님이 그러셨다. 놀면 뭐하냐고, 같이 회관에 있으면서 꼬무락거리며 동네 노인들에게 밥도 해주고 돈도 번다고... 그래서 언젠가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신  같다.

“네 어머니는 그래도 국가공무원이다.”     


전화가 왔다고 안사람이 나왔다. 종근 전화. 옷 입고 대기하라는 말, 여하간 좋다. 짤막 여행과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 일이 좋다. 내 얼굴이 펴진 것 같다. 옥과로 갈 줄 알았는데 구례 쪽으로 달린다. 압록에서 석곡 쪽으로 휘어들어 용궁가든으로 갔다. 언제 한 번 온 것 같다. 참게탕. 말이 참게지 어림도 없다. 게에다 메기가 들어 있는 탕이다. 텁텁한 맛이다. 식사를 마치고 태안사에 가보자고 한다. 가보니 골짜기가 길고 숲이 우거져 여름 피서지로 좋겠다. 곡성경찰서에서 공비를 소탕했다고 한다. 여기가 그 전적지다. 전몰 경찰 기념비가 있었다. - 구례 용궁가든에서 참게탕을 먹고 태안사를 가다 2014.4.20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니 비가 촉촉이 내렸다. 마당이 빗물을 먹고 다시 토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세수를 하고 있는데 안사람이 받는 전화가 종근이다. 11시에 만나자고 해서 좋다고 했다. 이제는 날씨가 눈으로 바뀌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다시 전화가 온다. 병철의 차에 생배추를 열 포기 정도 실었다.

금지 쪽으로 간다. 옥과로 가자고 한다. 눈이 이렇게 오는데 눈 쌓인 재를 넘어 멀리 가는 것은 별로 안 좋을 것 같다. 산 넘어가는 도로변에 중화요리집이 하나 생겼다. 그곳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짜장면을 먹으려다 홍합이 들어간 짬뽕을 시켰다. 옆사람 먹는 걸 보고 국물이 시원할 거 같아 그것을 시켰더니 생각보다 매워서 먹는데 오래 걸렸다.  - 중국요리집에서 매운 홍합 짬뽕을 먹다 2014.12.15      




종근이라는 분의 이름이 매주 한 번씩은 등장했다.

내가 보기에 그분은 일은 하지 않고 밥만 먹으러 아버지를 불러내시는 것 같았다. 어떤 분인지 계속 궁금증으로 남아 있다. 일기에 그 이름이 너무 자주 등장했고 대부분이 점심 먹자는 얘기였으며 아버지는 그때마다 한 번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물론 그런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 특이하기도 했고 감사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 인생에서 아들들보다 그런 친구가 더 살갑고 가깝지 않았을까. 자주 보는 친구가 먼 가족보다 낫다고 하지 않던가. 꼭 그분을 만나 늦게라도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


아버지는 66세 때 위암 수술을 받으신 적이 있다.

처음으로 몹쓸 병을 얻어 서울에 올라오시면서 힘들어하시던 그때의 모습이 생각난다. 다행히 초기 위암이라 완치가 되었고 위를 70% 정도 잘라내야 했다.

아버지 동년배인 명동 백병원 암 전문의인 김모 박사님은 통원치료 갈 때마다 아버지에게 담배 끊으라고 호통을 치셨다. 아버지는 그때까지 담배를 끊지 못했다. 병원에는 나름대로 양치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가셨지만, 특유의 몸에서 나는 그 담배냄새가 담배와 거리가 먼 박사님의 코를 비켜가진 못했다.

“지난번에 내가 뭐라 했소. 이 양반이 또 담배 못 끊고 왔네! 그럼 빨리 죽어요. 제발 담배 끊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에 비해 얼굴이 달빛처럼 환했던 중후한 그 박사님은 심장병으로 아버지보다 십 년은 일찍 돌아가셨다. 텔레비전 부고 뉴스를 접한 아버지는 ‘나 보고 오래 살아라고 한 사람이 먼저 갔다’고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셨다.


아버지 위 수술은 잘 됐지만 그 크기가 작아져 식사를 할 때마다 조금씩 자주 드셔야 했다. 그리고는 조금이라도 누워 있어야 소화가 잘 되었다. 수술 이후로 소화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긴 했지만, 관리를 잘하셔서 그랬는지 그렇게 음식 맛에 대한 말씀이 많았다. 무엇이든지 잘 드신 편이었다. 명절 때 아들들과 함께 있으면 늘 임금 수라상과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곤 했다. 외식을 자주 가졌던 친구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어머니께 국가공무원이라고 하신 이유가 혼자 외식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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