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초년병의 첫 발자국
오래 공기업을 다녔다. 강산이 서너 번 바뀌는 시절을 보내면서 이 사회에, 회사에,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하고 싶었다. 지금부터 서서히 풀어놓을 이야기들이 꼰대의 푸념이 될까. 추억의 보따리가 될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하 BB는 베이비부머
혼돈의 시절에 공기업에 입사했다.
세상은 몹시 시끄러웠고 모든 것이 이른바 군대 일색이었다. 군대만 군대가 아니었다. 학교도 직장도 사회도 대부분이 상명하복의 군대문화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절이었다. 광주는 고립되었고 스산한 거리에는 최루탄이 난무했다. 전쟁도 아니었는데 초목이 떨었다. 세상은 시끄러웠는데 신문은 접혀져 잉크가 말랐고, 소리치던 방송은 마이크가 꺼져 있었다. 입이 있어도 말을 조심해야 했고 눈이 있어도 감고 있어야 했다. 군대도 아닌 회사에서 여럿이 모여 잡담하는 것을 금지하는 공문이 전사적으로 뿌려졌다. 그것은 우리 회사 뿐만이 아니었다. 산하(傘下)기관이라는 단어는 국가정책의 정의, 불의와 상관없이 국가의 중차대한 일들이 터질 때마다 함께 보조를 맞추고 유기적이고 탄력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이른바 공동체적 운명이라는 묘한 사전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
2층 침대 앞에 꼿꼿이 서서 아침 점호를 끝낸 후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노란 바탕에 검은색 빗살 완장을 찬 초록 새마을 모자가 앞장을 서고 구호에 맞춰 하나 둘을 크게 외치면, 잠이 부족한 신참내기들은 하품을 하며 억지로 복창을 하면서 산 아래까지 구보를 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고요한 도심의 아침 이슬을 깨우고, 산 너머에서 밤새 넘어온 자욱한 안개가 동편 햇살에 걷힐 즈음이면 그들은 다시 헉헉거리며 운동장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아침 청소가 시작되었다. 구내 스피커에서는 사가(社歌)와 건전가요 '조국찬가'가 울려 퍼졌다.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수업이 시작되면 눈꺼풀은 천근만근의 무게로 온몸을 짓눌렀고, 그 몽롱해진 정신은 이내 비몽사몽간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터널 끝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지금은 병원이 있는 곳, 서슬이 시퍼렀던 시절, 도봉산 아래 쌍문동 연수원의 오전 일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저녁 점호가 끝나면 취침 전까지 삼삼오오 한쪽 구석으로 몰려들었다. 쥐죽은 듯 들리는 그 소리는 시국에 대한 토론회로 레지스탕스를 연상케 했고, 회사에 대해 어디서 주워들은 나름의 정보들을 토해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 구했는지 초록 술병이 잔 없는 틈을 타 여러 입술을 훑어댔다. 새우깡 부스러기 소리가 코러스를 만들어 목소리가 커지면 문앞에서 망을 보는 친구가 입에 손가락을 대며 주의를 줬다. 가끔 복도로 왔다갔다 하는 호랑이 사감은 눈에 레이저를 뿜으며 혹 발생할지도 모르는 철없는 조무라기들의 무단, 불법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며칠 전 동기생 하나가 밤에 담을 넘어 술을 사오다가 걸린 적이 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 그 동기생은 유급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유급을 당하면 발령을 바로 받지 못하고, 받는다 하더라도 부임지에 통보되어 뜻을 펼쳐보기도 전에 크게 불이익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그 똑같은 소리를 그들은 매 수업시간 끝날 때마다 여러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가요의 후렴구가 생각났다.
4주간 연수원에서 빡센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생전에 가보지도 않은 곳으로 발령을 받았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사이 연수원 구내 스피커는 올드랭 사인으로 울고, 동기생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지는 아쉬움에 어깨를 얼싸안았다. 내가 가야 할 그곳은 음식도 언어도 생활도 모든 것이 낯선 곳, 부임지와 약 한 시간이 걸리는 부산, 해수욕장이 있는 해운대였다. 우리나라에 이런 곳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제일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음식점의 음식이었다. 반찬이 몇 개 없었다. 일단 집을 구해야 했다. 하늘 아래가 시퍼런 시절, 겁도 없이 콧수염을 기른 친구와 함께 옷가지가 든 가방을 들고 전봇대에 붙어 있는 전월세 전단지를 훑어보았다. 토요일 오후 내내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겨우 방 하나를 구했다.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계약서 없이 월세 계약을 했다. 돈부터 주고 한 달을 살고 또 계속 연장하면 된다고 했다. 둘이서 첫날을 그렇게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을 달렸다. 해운대를 출발한 버스는 달맞이 고개를 넘고 송정해수욕장과 기장을 지나 새로운 부임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바로 말로만 듣던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였다. 원자력, 듣기만 해도 우리 햇병아리들에겐 위험한 단어였다. 단어를 생각하니 발령을 잘 받은 것인지 아닌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잘 받았다면 이곳 오지까지 올 리가 없었다. 서울 본사나 수도권 지점에 근무해야 발령을 잘 받았다고 할 것이었다. 내게는 서울에서, 고향에서 먼 그곳이 오지였다. 어쨌든 나는 그곳으로 발령을 받았고 앞으로 언제까지 근무해야 될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 내게 주어진 일을 해야 했으며, 어떤 업무를 해야 하는지는 가 봐야 알 일이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철저한 통제와 검열이 시작되었다.
청원경찰들이 차량 한 대 한 대를 트렁크까지 열어가며 철저하게 검사하고 있었다. 날마다 어떻게 이런 검사를 받으며 출근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은 직원이고 현장 노동자고 할 것 없이 다시 돌려보냈다. 어렵게 통과하고 난 후에 발전소장에게 신입 신고를 하고 첫 근무장소로 이동했다. 나와 내 친구가 근무할 곳은 새롭게 건설을 시작하는 현재 K 3,4호기 신규 프로젝트였다.(당시는 전체 원전 기공 순서를 호기명으로 칭해서 5,6호기로 불렀다) 여기저기에서 외국인 수퍼바이저들이 많이 보였다. 내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드디어 내가 국가기간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업무가 외국인과 함께 하고 있어서 당장 언어를 넘어서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제 막 20대 초반, 얼굴에 촌티가 질질 흐르고 머리카락은 꼿꼿하게 하늘로 치솟은 새파란 친구와 나는 엄청난 국가 프로젝트에 말단 초병으로 예고 없이 투입되었다. 첫 부임지에서 만난 푸른 눈의 중년의 사나이. Barry B. Commings. 그가 지금은 살아 있을까. 미국 벡텔 Bechtel 社에서 파견된 중후한 미국인, 그는 나의 외국인 파트너로 내 첫 카운터 파트였다.
그는 내 이름을 EQ라 불렀다. 그때 처음으로 Bechtel 社의 선진 문서관리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들은 지금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파일관리 프로그램을 오프라인 방식의 종이 파일로 사용하고 있었다. MS Windows가 나오기 이전 시절이었다. 철제 파일박스는 지금 컴퓨터의 디렉터리고 각각의 서랍은 폴더였으며, 그 안에 질서 정연하게 업무 네이밍이 되어 꽂혀 있는 종이 파일들은 지금 PC 폴더 안의 파일들이었다. 순전히 수작업 방식의 문서관리시스템으로 MS Windows 파일관리시스템의 전신이나 마찬가지였다. 문서관리에 대해 어떤 정돈된 시스템화를 생각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문서를 관리했던 당시 회사 시스템을 볼때 그것은 우리에게 신선했고 체계적이었으며 매우 실용적인 관리 방식이었다. 후에 MS Windows가 나왔을 때 빌게이츠가 벡텔사 문서관리를 참고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내부와는 달리 세상은 시끄러웠다. 광주는 소식이 전무했으며 소문만 무성했다. 시골집이 그곳에서 한 시간 거리였기 때문에 돌아가는 세상이 걱정스러웠다. 휴대폰도 없었고, 전화도 쉽지 않은 세상에 집과 연락이 두절된 지 거의 보름이 지났다. 답답한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신문은 읽기도 난감했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활자들이 종이 위에서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폭도들이었고 국가를 전복할 무법자들이었으며 북한이 개입했다고도 했다. 신문에 보도된 내용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전부였다.
주요 일간지에는 군복을 입고 모자를 쓴 무표정한 보안사령관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올라와 있었다. 다른 부서의 모 상사가 지나가다 그 신문을 보더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그 신문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래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은 멀쩡했고, 그분은 주먹이 아픈 듯 손등을 문지르더니 날 돌아보고 씩 웃었다. 나는 그가 왜 그렇게 그 정도로 적개심을 갖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치와 돌아가는 세상은 내 전공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