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재건과 함께 한 BB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중략)… 반공 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 1968.12.5 대통령 박정희
국민학교(초등학교) 교과서 제일 앞장에는 마치 찬송가 앞에 실린 ‘주기도문’처럼 국민교육헌장이 실렸다. 물론 중고등학교 교과서 첫머리에도 실렸다. BB 세대라면 누구나 입으로 달달 외웠던 국민계몽 헌장. 1968년에 제정되어 1994년 폐지될 때까지 거의 30년 가까이 상당한 기간 동안 국민을 교육하는 정신적 지표가 되었다. 얼마나 강하게 머릿속에 새겨졌던지 마땅히 타자 연습을 하거나 다른 문장이 떠오르지 않을 경우 지금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문장이 되었다. 즉, BB들에게는 제대로 각인된 이른바 국가가 국민에게 계몽을 목적으로 주입시킨 명 문장이었다.
사실 문장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그리 흠잡을 데가 없다. 그것은 당시 국내외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자는 내용으로 대부분의 국민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앞으로 국가와 국민이 나아가야 할 방향 제시 헌장이었으며, 국가 재건의 동기부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군사 정부의 민낯을 가리는 용도로 포장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었고,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크게 알 바 아니었다. 아직 어리기도 했지만 국가가 필요에 따라 그럴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구를 막론하고 무조건 달달 외우도록 강제한 반민주적 요소도 없지 않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시절은 좋은 것은 강제해도 문제가 안 되는 이른바 ‘나를 따르라!’가 통하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 혼돈과 재건의 시대 중심에 있었던 BB세대.
이른바 베이비붐(BB) 세대는 6.25 전쟁 이후 출산 붐을 타고 태어난 사람들로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될 당시 1955년생은 중학교 1학년이었으며 1963년생은 만 5살로 취학하자마자 자연스럽게 국민교육헌장을 접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국가의 교육이념의 바이블로 받아들였다.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 대통령 이름으로 반포되었지만, 이 393자로 된 문장이 나오기까지 각계각층의 의견을 총망라하여 당시 문교부에서 기초위원과 심사위원 총 74명이 선정되어 심의하였고,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로 전체 심의위원회 등을 5회, 국무총리 주재 소위 4회가 개최되었다. 1968년 6월부터 5개월에 걸쳐 검토, 심의한 이 국민교육헌장은 같은 해 11월에 국회의 만장일치 통과로 다음 달인 12월 5일에 대통령이 선포했다.
국민교육헌장은 국회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지만 전혀 반대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일본 메이지 유신 때 ‘교육칙어’를 그대로 모방한 군국주의 잔재라는 일부의 비난이 있었고, 제정 과정에서 신중성, 민주적 의견수렴, 실천의 적정성 등에 대한 비판 논조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산업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시기였던 만큼, 그 누구도 내용에 대해 부정하는 논조는 거의 없었다. 선포 다음 해인 1969년도부터는 초중고 교과서 첫머리에 모두 실렸고, 정부 차원의 확산 운동이 빠르게 전개되었으며, 국민학교 학생들은 모두가 빠짐없이 암송해야 했다. 시험에도 자주 나왔다. 특히 어떤 행사만 있으면 국민의례와 더불어 집단으로 암송해야 했고, 학교에서는 수업 시작 전 모두 일어나 먼저 낭독해야 했다.
그 누구보다도 BB세대는 이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학교를 다니며 이후 1970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과 함께 새 역사를 창조하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시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이루는 근간으로, 온 국민들 마음에 강력하게 심긴 산업 역군들로 거듭나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국가의 정책 추진에 대해 이견을 가진 세력들이 거의 없었고, ‘잘 살아보자’라는 구호 하나가 모든 것을 덮었다. 그만큼 대한민국은 전후 피폐해진 국내 상황을 빨리 재건해야 하는, 외부의 도움도 필요했지만 당장 스스로 뭐라도 해야 하는 배고픈 나라였다. 그래서 투 트랙으로 정책을 편 것이 정신적인 면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이었고, 육체적 실천 운동이 바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모두가 팔을 걷어붙인 새마을운동이었다
국민교육헌장과 새마을운동을 칭송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어떻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직도 세상은 가난했고 이제 막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어린 우리들은 국가 재건의 동량들이었다. 지금은 우스운 얘기지만 남북한이 일부 그런 면에서는 비슷했다. 물론 북한은 지금도 여전히 변한 것이 없지만, 그때는 전쟁이 끝난 지 20년 전후였기에 그들은 사회주의 이념 강화를 위해 국가 차원의 통제가 남한보다 더 철저한 사회였다. 어쨌든, 당시 나라의 재건을 위해서 국가가 주도적으로 추진한 정책에 누구나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보이지 않은 곳에서는 권력 암투도 있었고, 장기집권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도 이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 정책들은 군사정권이 바뀌어 가면서 원래 의도와 순수성을 잃어가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직장에 들어가기까지 늘 함께 있었던 국민교육헌장과 새마을 운동. 아마도 다는 아니겠지만 많은 BB세대들이 그 시절의 그 향수 때문에 젊은 세대들이 싫어하는 극 보수의 길을 자연스럽게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념 논쟁은 하고 싶지 않다. 누구보다도 내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사람들마다 가치관과 국가관은 같을 수 없다. 국가관이 다르다고 애국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누구를 불문하고 더 나은 국가를 만들기 위한 정치나 제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이상한 선입견 때문에 자신과 조금 다른 주장을 한다고 반대편의 주장을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는 세태가 부끄럽고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게 민주화의 열망이 봇물처럼 불타올랐던 80년대를 넘어왔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민주화 이전의 상태는 겉은 민주주의였지만 속은 민주적이지 못했기에 민주사회에 대한 열망이 컸다는 반증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한 단계 높은 민주 사회를 만들어 왔다고 자부한다. 이제 막 직장에 들어가 그 소용돌이 속에서 한 발 벗어나 있었지만, 내 고향과 가까운 광주는 피로 물들어갔고, 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주화를 위해 수많은 민주 열사들이 유명을 달리하는 고통을 겪었다. 가해자들은 입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외쳤지만, 그들의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권력을 마음껏 활용하는 특별한 민주주의였기에 깨어있는 국민들의 공분이 컸던 것이다. 지금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파고 진실을 왜곡하는데 앞장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큰소리 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