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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20. 2020
‘택리지’
어디에 살아야 하나, 어느곳에 살게 될까?
이중환 ‘택리지’
총론 중..
... 사람이 이미 목석이나 금수가 아니고, 사람과 더불어 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으니, 머리를 들고 눈을 뜨면 곧 남과 접촉하게 된다. 대저 남과 접촉하면 친하고 싫어하는 것이 생기고, 친함과 싫어함은 좋아하고 미워함이 생긴다. 친함과 좋아함은 어울리고 합침이 생기고, 미워함과 싫어함은 떨어지고 배반함이 생기게 한다. 한 번 어울림과 배반함, 떨어짐과 합침이라는 지목을 받게 되면, 문득 한계가 생겨 저쪽이 이쪽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쪽도 능히 저쪽에 가지 못한다. 비록 중간에서 이해를 살펴 행동하려 해도 또한 할 수 없다. 오직 이 한계가 사람을 우리에 가두어 산도 하수도 아닌 것이 쇠와 돌보다 더 굳고, 방향도 없는 것이 정해진 위치만은 확실하다. 한 사람도 이 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 이것이 오늘날 치우친 논의의 형태이다.
이 치우친 논의가 처음에는 사대부 사이에서 생겼으나, 끝판의 폐단은 사람을 서로 용납될 곳이 없게 한다. 옛말에 “불이 나무에서 생겼으나, 불이 일어나면 반드시 나무를 이긴다.”하였다. 그러므로 동쪽에도 살 수 없고, 서쪽에도 살 수 없으며, 남쪽에도 살 수 없고, 북쪽에도 또 살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살 곳이 없다. 살 곳이 없으면 동.서.남.북이 없고, 동서남북이 없으면 곧 사물이 구별이 확실하지 않는 하나의 태극도이다. 이렇다면 사대부도 없고, 농.공.상도 없으며, 또 살 만한 곳도 없을 것이니, 이것을 땅이 아닌 땅이라 하는 것이다. 이에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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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택리지를 읽다 필사한 구절이다.
토지에 대한 관찰인줄 알았으나, 사람에 대한 기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