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의미'가 상실된 기자들

by 캘리박


가끔 기사에 붙은 댓글을 보면 ‘요즘 기자들은 소명의식이 없어.’라고 비판하는 걸 볼 수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처음에 언론사에 입사할 때 기자들의 소명의식은 넘쳐난다. 내가 쓴 기사를 통해서 우리 사회를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품고 입사한다. 언론사 면접 때 면접관의 “마지막으로 할말 없나요?”라는 질문에 많은 합격자들이 이 같은 취지의 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사에 입사한 후 몇 개월이 지나게 되면 기자로서의 자존감은 땅에 떨어진다. 나는 수많은 언론사에서 비슷한 기사를 쓰는 여러 기자 중의 한 명일뿐이며, 회사에서 떨어지는 답정너식 기사를 써야할 때의 자괴감과 각종 협찬, 특집 기사도 써야 하고 취재도 해야 할 때 그 일의 과정 속에서 나라는 사람 자체가 사라진 것 같은 자괴감이 내 자신에게 내면화되기 때문이다. 이내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게 맞은 것일까’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지내다 보면 어느 덧 중고참 기자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하지만 내 삶이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그 삶에 적응을 해버린 것이다. 소명의식은 점점 가물가물해져가고 기자라는 직업이 나의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한 생업이 된 것이다. 물론 모든 기자들이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마다 느끼는 것이 다를 것이다.

나는 위 기사의 댓글처럼 기자가 쓴 글만 보고 이 기자가 소명의식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소명의식의 유무는 전적으로 그 기자의 개인적인 차원에 해당하며, 설령 그 기자가 기자를 생업으로 여긴다고 해도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저촉되는 것은 없다. 오히려 생업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게 될 수도 있다. 내 직업과 조직에 대해 실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을 냉철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독심술사도 아니고 자기 자신의 정치적인 스펙트럼에 따라 기사만 보고 소명의식이 있네 없네 판단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소명의식이냐 생업이냐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기자들이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영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봤던 것처럼 기자들은 레드오션의 한 가운데인 언론사에 입사해서 데스크의 OEM식 기사를 쏟아내야 한다. 내가 발제하고 싶은 걸 발제해도 회사에서 지면에 넣어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회사 논조에 맞는 것이 기사가 아니면 아무런 코칭을 해주지 않고 쿠킹이 덜 됐다는 이유로 뭉개기 일쑤다. 데스크의 답정너식 기사를 쓸 때면 기사 송출 후의 후폭풍은 온전히 그 기사에 바이라인(By Line)이 붙은 기자가 감내해야 한다. 설사 내가 쓴 기사의 데스크가 자기 입맛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써서 송출했다고 하더라도 취재원의 항의와 기사 수정요구에 대한 응대 등은 기자가 수행해야 한다. 이는 워킹 라이프 벨런스를 중요시 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과도 배치된다. 때론 오후 5시에 인터넷에 송고된 기사 때문에 밤 11시까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항의 전화와 기사 수정에만 매달려야 할 때가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평생 직업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어떤 가치보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중요시한다. 그것은 기자가 된 한명의 사람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청운의 꿈을 품고 입사한 언론사가 피튀기는 레드오션이며,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각종 포럼을 위해 업계 사람들을 동원해야 하고, 특집기사, 협찬기사를 쓰는데 정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사실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기자들은 일의 의미를 점점 더 상실해 간다.

미국 듀크대 교수인 댄 애리얼리는 생산성 증가와 행복한 직장생활을 위해서는 인센티브(금전적 보상)만이 아니라 의미(Meaning), 창의성(Creation), 도전(Challenge), 소유의식(Owenership), 정체성(Identity), 자부심(Pride) 등이 모두 합쳐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재 언론사 조직에서 이 모든 요소를 만족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라. 단 하나의 요소도 충족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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