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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파르크 Oct 13. 2017

정화, 바다를 호령한 대항해가(상)

 인도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에 알린 콜럼버스. 이들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대표적인 탐험가들입니다. 개척과 도전의 아이콘이죠. 하지만, 이들의 탐험을 보고 “에이~ 소꿉장난 수준이네~”하며 미소 지을 법한 사람이 중국에 있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거만할 수 있냐구요? 그는 이들보다 50여 년 전에 훨씬 대단한 탐험을 했답니다.     


 이 사람은 바로 14세기 명나라의 환관 정화입니다.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를 넘어 아프리카까지의 대원정을 무려 7차례나 떠났죠. 특히 그 규모가 유럽 대항해시대 탐험가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길이 138미터, 너비 56미터의 엄청난 규모의 함선 60여 척을 비롯해 선원은 2만 7천 명이 항해에 참가했습니다. 바스코 다 가마와 비교해볼까요? 그의 배는 길이 25미터, 너비 5미터의 작은 선박 네 척 뿐이었습니다. 바스코 다 가마의 배를 정화의 배에 일렬로 놓으면 5척을 놓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배와 선단을 지휘하며 탐험했던 정화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리고 왜 원정을 떠났던 것일까요?      



    


[정화의 출생과 성장]

 정화는 1371년 운남성의 곤명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곳은 원나라 때부터 중국의 통치를 받기 시작한 곳으로,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정화는 이슬람교를 믿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정화의 아버지는 아라비아의 메카로 성지순례까지 다녀온 독실한 무슬림이었습니다. 이슬람인들은 원나라 시절, 눈에 색깔이 있는 사람이란 뜻의 색목인으로 불리며 대접받고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교도인 정화 가족도 유복하고 안정적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린 정화에게 큰 시련이 다가옵니다.     


 정화 어린 시절은 명나라가 원나라를 무너뜨리던 때였습니다. 거대한 중국을 명나라가 차지하고서도 이곳저곳에 원나라 세력이 조금씩 남아있었죠. 중국 외곽이었던 운남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영락제가 되는 홍무제의 아들 주체가 이곳으로 쳐들어옵니다. 잔혹하고도 냉철했던 주체는 이곳 주민들을 학살합니다. 특히 어린 남자아이들은 모두 거세시키죠. 12살이었던 정화도 이를 피할 순 없었습니다. 정화는 거세당한 뒤, 주체의 환관으로 끌려갑니다.     


 자신을 거세시킨 주체를 원망할 법도 한데, 정화는 큰 공을 세우며 주체의 총애를 한 몸에 받습니다. 주체가 황제가 되기 위해 조카 건문제와 전쟁을 벌일 때, 여러 차례 주체를 돕습니다. 정화는 중동 사람들이 그렇듯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키가 9척이나 되는 등 풍채와 체격이 좋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머리까지 영특했다는 기록도 있지요. 몸도 좋고, 머리도 좋으니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었겠지요. 주체에겐 든든한 신하였을 겁니다.      


 정화의 본래 성은 마(馬)씨였습니다. 황제가 된 주체, 영락제는 마화에게 ‘정’이라는 성씨도 하사하고, 환관 중에 두 번째로 높은 벼슬도 줍니다. 이렇게 정화는 영락제의 핵심 측근으로 성장해갑니다.      



    


[유례가 없는 대원정을 왜 시작했을까]

 영락제는 조카 건문제와 몇 년간에 걸친 전쟁 끝에 힘겹게 황제가 되었습니다. 군사적 역량이 뛰어났던 그는 황제가 된 후에도 대외원정에 힘을 쏟습니다. 보통 황제들은 직접 군대를 이끌지 않습니다. 장군을 시키죠. 하지만 영락제는 몸소 군대를 통솔하며, 만리장성 너머 몽골 초원을 공격합니다. 그리곤, 바다 쪽으로 나아가는 것도 욕심을 내죠. 몸이 두 개가 아니니 바다 쪽 대원정은 믿을만한 장군에게 맡깁니다. 바로 정화였죠. 동남아, 인도, 중동, 아프리카까지 다녀오라고 명령합니다.     


 대원정은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아마 전 왕조 원나라 때 서구와 교류를 활발히 하며 다른 세계에 대한 인식이 넓어진 덕도 있겠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영락제가 수 만 명을 동원해 대원정을 기획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지 않을까요? 두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폐위된 건문제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건문제는 영락제와의 전쟁에서 실종되었습니다. 그런데, 저자거리에 수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건문제가 목숨을 부지해 해외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다는 거죠. 영락제는 걱정에 빠집니다.     


 조선 세조도 계유정난으로 단종을 폐위시킨 후, 붙잡아 강원도 영월로 유폐시킵니다. 그러고도 불안해 단종이 자살하도록 했죠. 혹시나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단종을 중심으로 뭉칠 수도 있으니, 그 싹이 될 수도 있는 단종을 아예 죽여 버린 것이죠.     


 세조는 큰 전쟁 없이, 야밤기습을 통해 단종세력을 물리쳤습니다. 일거에 정권을 장악했죠. 하지만 영락제는 힘겹게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무려 4년이나 내전을 치러야 했죠. 건문제 세력도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건문제가 어디선가 살아 돌아와, 흩어진 부하들과 군사들을 규합해 다시 전쟁을 벌일까봐 영락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영락제는 저자의 소문에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밤잠을 설쳤겠죠. 동남아건 인도건 하다못해 아프리카까지 샅샅이 뒤져보고 싶었을 겁니다.     



 둘째로, 조공국을 늘리고자 했습니다.

 조공책봉 시스템은 중국의 오랜 외교체제였습니다. 주변국을 정복하거나 점령하여 직접 지배하기보단, 황제가 주변국 왕을 그 지역의 책임자로 임명합니다. 이를 책봉이라고 하는데, 보통 왕 칭호를 주고, 임명장과 인장을 보내줍니다. 그러면 책봉을 받은 왕은 조공, 즉 해당지역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칩니다. 중국 황제는 이를 환대해주고, 답례품을 거하게 줍니다. 이는 동양의 국제질서이자 문화와 경제 교류의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조공국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중국왕조의 대외적 영향력이 강하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쿠데타로 황제에 오른 영락제는 조공국을 늘려 대외적 영향력을 과시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자 했습니다. 조카를 쫓아낸 못된 삼촌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하고, 동남아에서도 조공을 받는 강력한 황제라는 박수를 받으려고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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