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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파르크 Oct 15. 2017

마테오리치, 교류의 물꼬를 튼 언어천재(하)

[명나라의 심장부에서 가톨릭을 전파하다]

 마테오리치가 활동하던 때, 명나라의 황제는 만력제였습니다. 마테오리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던 황제를 개종시키려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가톨릭을 믿으면, 온 명나라 사람이 황제를 따라 개종할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죠.      


 황제의 관심을 사기위해 서양의 각종 기계 장치를 헌상합니다. 만력제는 특히 자명종 시계에 큰 관심을 보입니다. 곧바로 마테오리치를 접견합니다. 만력제는 마테오리치를 만나곤 중국말은 물론 유교에도 해박한 모습에 감탄합니다. 그를 쏙 마음에 들어 합니다. 그래서 북경에 성당을 세울 수 있게 해주고, 경제적으로도 지원을 약속합니다. 


 마테오리치는 황제를 전도하는 것엔 실패했으나, 명나라의 심장부에서 선교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성과를 거두죠. 중국의 심장부에서 정력적으로 선교와 동서양 문명 교류에 힘쓰기 시작합니다.    

      


 마테오리치가 가톨릭을 선교하는 데 직접 쓴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이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 천주실의는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이기도 했습니다. 천주실의는 한문으로 쓴 가톨릭 교리 해설서입니다. 서양학자와 중국학자가 등장해 서로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전통유학과 가톨릭 교리를 대변하며 차근차근 자신의 논리를 펴갑니다. 이들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쉽게 가톨릭 교리를 습득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에 하느님의 존재가 있죠. 중국인들에겐 하느님은 생소한 개념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유교 경전에 나오는 하늘의 신 상제를 끌어옵니다. 상제는 하늘에서 조정을 운영하며 땅을 감시하고, 만물을 생성하고 변화시키는 존재였습니다. 천주실의는 이 상제와 가톨릭의 하느님이 같은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천주실의는 불티나게 팔려나갑니다. 많은 지식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합니다. 마테오가 죽을 즈음엔 중국의 가톨릭 신자가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서양의 문물도 마테오리치를 통해 중국에 퍼져나갑니다. 친한 중국 친구들과 유럽 학술서를 공동 번역합니다. 서광계와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번역한 ‘기하원본’을 펴냅니다. 이지조와는 중국 전통 수학과 서양의 수학을 결합한 ‘동문산지(同文算指)’를 내놓습니다.     



 그는 중국인의 세계관을 뒤바꿔놓기도 합니다.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라는 세계지도도 펴냅니다. 열두 번이나 판을 거듭해 여러 도시에 출간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아직 세계 지리에 대해 깜깜했던 중국인들의 눈을 뜨게 해줍니다. 중국인을 위한 지도이니만큼 동아시아를 세계지도 중앙에 배치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지도와 배치가 똑같죠.

 곤여만국전도는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전래됩니다. 우리나라엔 1603년(선조36년)에 들어와 실학파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곤여만국전도는 세계를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메카라니아 5개로 구분합니다. 메카라니아는 호주, 뉴질랜드 일대인데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아 큰 대륙으로 뭉뚱그려 그렸습니다.      




          

[전례논쟁으로 마테오리치의 노력이 빛을 바라다]

 1610년, 마테오리치는 북경에서 눈을 감습니다. 마테오리치에 대한 중국인의 애정이 얼마나 대단했었지 마테오리치를 공자, 맹자처럼 자(子)를 붙여 ‘이자’라고 불렀습니다. 마테오리치가 북경의 성당에 안치될 땐, 곁에 있던 중국인들은 그를 성인이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중국과 중국인 깊숙이 파고들어 그들의 마음을 열었던 마테오리치. 그는 서양과 중국 간 교류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무색해지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전례논쟁이죠. 

    

 1630년대, 가톨릭의 다른 수도회가 중국에 들어옵니다. 도미니크수도회와 프란체스코수도회였습니다. 가톨릭의 원칙을 중시하던 그들은 예수회의 행태를 보고 깜짝 놀랍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의 전통 예절을 존중하고 따르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죠. 예수회는 중국 황제에게 절하고, 심지어 공자의 제사에도 참여했습니다. 


 도미니크수도회와 프란체스코수도회는 예수회가 가톨릭의 전통과 원칙을 어기고 있다며 분노합니다. 로마의 교황에게 바로 쪼르르 달려가 열변을 토합니다. 예수회의 이런 행태를 금지해달라고 말입니다. 교황은 이들의 말에 놀라, 예수회가 중국전통을, 즉 중국전례를 따르는 것을 금지하는 특사를 보냅니다. 중국 황제는 열 받죠. 중화사상에 따라 세상의 중심인 자신이 특별히 마테오리치를 어여삐 여겨 가톨릭을 허락해준 것인데 말이죠. 결국 황제는 선교사를 모두 추방하고, 가톨릭을 전면 금지합니다.     


 마테오리치가 온 평생을 다해 쌓은 기반이 무너져 버립니다. 진정한 교류를 위해선 상대를 이해하는 개방적인 자세가 우선입니다. 이를 실천하며 중국인이 되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으로 마테오리치가 삶을 다해 이룩한 교류의 장이 무색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현재 가톨릭, 즉 천주교는 해당 국가의 문화와 전통을 인정해주는데 말이죠. 천주교도들은 우리나라 차례와 제사에 모두 참여합니다. 바로 1963년 로마교황청은 제2 바티칸공의회에서 각 나라의 전례, 전통, 풍습을 인정한 이후입니다. 


 진정한 교류를 위한 태도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마테오리치의 정신이 결국 승리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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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podbbang.com/ch/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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