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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파르크 Oct 17. 2017

무측천, 유일무이한 여황제(하)

[황후를 너머 황제의 자리를 꿰차다]

 황후까지 제거한 무조. 보통 사람이라면 황후가 되면 모든 야망을 이뤘다고 만족했을 겁니다. 하지만, 무조는 황후로도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그릇은 온 중국을 품을 수 있는 크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녀는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움켜쥘 배포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황후가 되자 본격적으로 자기 세력을 구축합니다. 이내 고종에게도 위협이 될 정도로 강한 게력을 구축합니다. 고종이 주변 신하들과 무황후를 우려하며, 그녀의 폐위를 의논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중에 무조는 이곳에 심복이 심어 놨습니다. 무조는 심복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듣고는, 고종과 폐위를 논했던 신하 모두를 숙청합니다.    

 

 이젠 고종도 무조를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황제만 아니었지 무황후의 세상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고종이 죽고, 무황후의 아들이 황제에 오릅니다. 무황후는 여전히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죠. 아들들은 어머니의 손에서 벗어나 자신이 직접 나라를 통치하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무황후는 얄짤 없이 대응했습니다. 아들의 황제 자리를 빼앗아버리죠. 그리곤 무황후에게 가장 순종적이었던 막내아들 이단을 황제로 만듭니다. 그리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합니다.          



그리고 황제 자리에 오르기 위한 밑작업을 시작합니다. 

    

 무황후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재를 대폭 기용합니다.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서였죠. 

 중앙정계에 소외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손을 뻗습니다. 관직이 낮았지만 똘똘했던 젊은 학자들을 우대합니다. 당시 궁궐 북쪽 문으로 출입하던 젊은 학자들을 북문학사라 불렀습니다. 이 북문학사를 우대해, 이들에게 재상의 임무를 쪼개 나눠줍니다. 여러 학술서를 쓰도록 지원도 합니다. 재상의 권한도 약화시키고, 문화도 융성시키고, 젊은 관료들의 마음도 사로잡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둡니다.          



 권력도 쥐고 있겠다, 우호 세력도 구축했겠다, 남은 것은 황제자리였습니다. 여자가 황제에 오르면 여론의 반대가 거셀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황제 등극을 정당화하는 기획을 합니다. 

     

 먼저, 불교 경전을 조작해 여론을 자기 편으로 만듭니다. 대운경(大雲經)이라는 경전에 ‘미륵불이 현실세계로 내려와 여자 황제가 될 것이다’는 예언 내용을 적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널리 배포합니다. 자신이 현실로 내려온 미륵불이라고 선전한 것이죠. 그리고 수 만 명을 동원해 무황후의 황제 등극을 청원하게 합니다. 상서로운 동물인 봉황과 주작이 등장했다는 소문도 살짝 내주고요. 결국 못 이기는 척, 690년 무황후는 당나라를 없애고 주나라를 세워 황제자리에 오릅니다. 이를 무주혁명이라고도 합니다. 




               

[호쾌한 여황제무자비를 남기다]

 무주혁명을 두고 후세 역사가들은 ‘여화(女禍)’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자에 의한 화, 재난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그저 한 여자가 정권을 찬탈한, 단순한 이벤트로만 평가하는 것은 무주혁명의 단면만 바라본 것입니다.     

 무주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정치세력의 교체와 태평성세의 기반을 쌓은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측천은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 세력을 대폭 물갈이합니다. 소외된 지방, 계층을 적극적으로 등용합니다. 귀족 중심으로 굴러가던 중앙정계에 과거 출신 관료라는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습니다. 이 관료들은 당나라의 전성기로 평가받는 현종 때 크게 활약합니다. 중국에서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안정된 시기를 ‘00의 치’라고 합니다. 현종 때를 ‘개원의 치’라고 하는데, 이를 이끌었던 명재상 요숭과 숭경이 모두 무측천 때 등용된 인물입니다.      



 무측천 시기를 ‘무주의 치’라고 하기도 합니다. 나라도 바뀌고, 황제도 바뀌었지만 국법을 엄격히 해 귀족이나 관료들이 농민을 수탈하거나 횡포를 부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농민반란 한 번 없이 정치적으로 안정되었었죠. 장안의 인구는 100만을 넘어설 정도로 번성했습니다.            


 물론 무측천이 공만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후궁시절 때 보여준 잔혹한 성격처럼 공포정치를 폈습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잔인하게 숙청했습니다. 한 번의 밀고에 한 가문의 수천 명이 모두 목숨을 잃습니다.                


 무측천의 말년. 그녀의 후손들은 당연히 당나라 황제 가문인 ‘이’씨였습니다. 가족제도까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들 중종이 복위되며 당나라가 재건됩니다. 50여 년 천하를 호령한 여걸 무측천은 82세의 나이로 눈을 감습니다.     



 중국 시안에서 60km 떨어진 곳에 건릉(乾陵)이 있습니다. 당나라 고종과 무측천이 묻힌 곳이죠. 이곳에 무자비(無字碑)가 있습니다. 아무 글씨가 없는 비석이라는 뜻입니다. 무측천은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업적이 너무 많아 글로 남기기 힘드니 아무 것도 새기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이런 밋밋한 비석이 남아있게 됩니다. 

<논어>에 “백성이 그 덕을 칭송할 자취조차 없구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덕이 아주 많은 사람은 그 덕이 너무 많아 어떻게 칭송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무측천은 이 논어의 글귀에 영감을 받아 무자비를 만듭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얼마나 자신의 일생에 얼마나 자부심이 넘쳤던 것일까요. 죽는 순간까지도 호쾌한 여황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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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podbbang.com/ch/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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