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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파르크 Oct 19. 2017

왕안석, 중국 최고의 개혁가(상)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이끌며,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의 기틀을 다집니다.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새로운 정치체제를 실현한 인물이죠. 이런 레닌에게 누가 물어봤다고 합니다.       


“역사상 최고의 개혁가는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레닌의 지목한 인물은 의외로 중국에 있었습니다.      


“바로 11세기 송나라의 왕안석입니다.”     


 왕안석은 당시 송나라의 병폐 가득한 군사, 세금, 토지, 교육제도 등 사회 전반에  손을 안 뻗친 곳이 없었습니다. 정력적인 개혁가였죠. 시름시름 앓아가며 망국으로 치달아가던 송나라를 다시 벌떡- 일어서게 했습니다.      

레닌이 극찬한 왕안석. 그의 일생을 쫓아가 보겠습니다.           




[문신들만 편애하던 송나라]

 우선 11세기 송나라의 상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송나라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왕안석이란 개혁가가 필요했던 걸까요.     


 송나라는 ‘문치주의’라는 캐릭터를 가진 나라입니다. 문(文)! 글 읽는 문신들이 중심이 되어 치(治)! 다스린다는 것이죠. 왜 이렇게 문신들만 편애한 것일까요?      


 송나라를 세운 태조 조광윤이 만든 전통 때문입니다. 문신만 우대하고, 조광윤은 무인은 철저히 배척하고 국가의 모든 것을 문신 중심으로 처리했습니다. 조광윤이 문신만 좋아하는 것을 보니 많은 문신 출신이냐구요? 아닙니다. 조광윤은 무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싸움을 잘하고, 전쟁에 능수능란한 인물이었죠.      


 당나라가 망하자 여러 작은 나라들이 여기저기 생겨납니다. 이 나라들이 서로 치고 박고 다투던 ‘5대10국 시대’가 열립니다. 오직 힘의 논리만 통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조광윤은 가난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장군까지 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숱한 전쟁과 위기의 연속이었죠.      

 탁월한 장군이던 조광윤은 다른 경쟁자를 모두 물리치고 결국 중국을 통일해 송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광윤은 전쟁과 싸움이 진절머리 났습니다. 전쟁과 싸움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전쟁과 관련된 군인, 즉 무인들을 철저히 정치에서 배제시킵니다.     

 그리고 실력 있는 문신들을 등용하기 위해 과거를 시행합니다. 합격자를 문신관료 엘리트로 집중 육성합니다. 조광윤은 과거에 참 관심이 많았습니다. 과거의 마지막 단계인 ‘전시’를 만들어 황제가 직접 주관합니다. 최종합격생을 직접 뽑는 것이죠. 이런 장치를 통해 합격한 문신들은 자신을 뽑아준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게 하는 효과를 거둡니다. 이들 과거출신 문신관료들은 나라 전반을 장악해 나갑니다.          


 하지만,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문제가 벌어지죠. 점차 부작용이 생겨납니다.      

 무인들에 소홀하다 보니 점차 군사력과 국방력이 약해집니다. 송나라가 옆 나라 ‘서하’와 전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쓸만한 무인이 없으니 계속 밀립니다. 전쟁은 인력 동원, 식량 보급 등이 필요한 돈 먹는 하마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끝내야 낭비를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송나라 군대는 힘이 약하다 보니, 전쟁이 길어지고 돈은 돈대로 쓰게 됩니다.


 또, 문신 관료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였습니다. 송나라 건국 초엔 1만 명이던 관료가, 점차 2만 4천 여 명까지 늘어납니다. 관료의 봉급이 늘어나 국고가 낭비되고, 관료조직이 복잡해져 행정도 비효율으로 됩니다.     

 송나라는 오랜 전쟁과 비대한 관료들로 이래저래 재정적자의 수렁에 빠집니다. 결국 건국 100여 년 만에 국가파산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국가조직을 개편하고 국가살림살이를 위한 개혁이 필요했습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왕안석입니다.          




[스타지방관 왕안석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다]

 왕안석은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명문가도 아니었고, 부유하지도 않은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생계형 관료라고나 할까요. 왕안석이 19살 되던 해 아버지가 급작스레 돌아가십니다. 생계를 유지하던 아버지의 봉급이 사라지자 가세가 확 기울게 됩니다. 가난한 왕안석은 돈이 없어 따로 스승을 둘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유교 경전을 읽으며 공부했죠. 그 덕에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과 이상을 이때부터 그릴 수 있었습니다.     


 왕안석은 혼자서도 곧잘 공부를 했습니다. 23살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을 시작합니다. 허나 그는 독특했습니다. 자청해서 지방관으로만 근무합니다. 개혁가로서의 진면목을 이때부터 드러냅니다. 물을 다스리는 수리사업과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는 사업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며 황제가 있는 수도까지 그 소문이 파다히 퍼집니다. 일약 스타 지방관이 된 것이죠.


왕안석은 혼자 공부하며 확립했던 철학을 지방을 다스리며 실제로 구현해본 것입니다. 또한, 지방 향촌 사회를 눈앞에서 관찰하며 일반 서민의 삶과 그들의 문제에 대해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왕안석이 스타지방관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때, 스무 살의 젊은 황제 신종이 즉위합니다. 혈기왕성한 젊은 황제는 뜨거운 자신의 피처럼 개혁의지가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주변엔 늙고, 의욕 없는 선대 황제의 신하들뿐이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개혁을 해볼라치면, 보수적인 신하들은 움직이려하지 않았습니다. 신종을 피곤하게만 생각했죠. 신종은 개혁 파트너가 될만한 새로운 인물을 등용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신종 곁에 한유라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한유는 항상 좋은 정책을 제안해 신종에게 많은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칭찬을 들을 때마다 한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친구인 왕안석의 생각입니다.”     


 신종은 왕안석 이름을 자꾸 듣다보니 그에게 호감을 품게 됩니다. 더군다나 왕안석이 지방에서 혁혁한 성과를 내며 이름을 떨치기까지 하자 신종은 자신이 꿈꾸는 국가 개혁의 적임자로 왕안석을 점찍습니다.   


        





팟캐스트 방송으로도 <역사를 걷는 밤>을 즐겨보세요:)

  http://www.podbbang.com/ch/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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