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담파르크 Oct 11. 2017

칭기즈칸, 가장 탁월했던 정복가(중)

전쟁의 신, 유라시아를 호령하다



[전쟁의 신 칭기즈칸유라시아를 호령하다]

 어른으로 성장한 칭기즈칸은 아버지와 친했던 케레이트족과 동맹을 맺습니다. 아내가 결혼 때 가져왔던 고급 담비 가죽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케레이트 족장이 담비가죽을 엄청 좋아했는지,  흔쾌히 칭기즈칸에게 수많은 군사를 지원해줍니다.      


 날개를 단 칭기즈칸은 난립해있던 몽골부족을 하나씩 병합시킵니다. 모든 몽골족을 아우르게 된 1206년, 부족장회의인 쿠릴타이를 열어 칸의 자리에 오릅니다. 칸은 유목민 최고 지도자를 뜻합니다. 그냥 칸이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칸’이란 뜻의 칭기즈‘칸’으로 불립니다. 그전 이름은 테무진으로, 몽골말로 ‘최고의 쇠로 만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최고의 쇠처럼 강인했던 칭기즈칸이 전쟁만 일삼은 것은 아닙니다. 몽골부족을 통합한 후 내부적으로 제도와 문물을 정비했습니다. 몽골 문자를 만들었습니다. 이 문자로 몽골의 역사를 기록합니다. 원활한 통치를 위해 부족들이 지켜야할 법률을 만들기도 했죠.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족은 이제 밖으로 뻗어나갈 준비를 끝냅니다.     

 칭기즈칸의 처음 눈길이 닿은 곳은 서하였습니다. 지금의 티벳 지역에 있던 서하는 동서교역에 힘써 경제가 발달하고, 농경과 유목 모두가 번성했던 곳이었습니다. 1209년 칭기즈칸은 서하를 침공해 약탈합니다. 서하는 왕의 딸을 바치며, 백기를 듭니다.

 다음은 금나라였습니다. 금나라는 여진족이 만든 유목국가였지만, 중원대륙과 한(漢)문화에만 관심이 많았습니다. 더구나 남쪽 송나라와 전쟁으로 힘이 빠져있었습니다. 한화(漢化)되면서 거친 유목민의 용맹함도 잃어버렸죠. 말을 타고 활을 쏘던 사람들이 중국의 행정 관료가 되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문서만 보고 있었습니다. 들판현직자이자 유목현직자였던 몽골에겐 손쉬운 전쟁 상대였습니다. 금나라는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며 쫓겨났습니다.     


 보통 유목부족들은 이 정도에 만족했을 겁니다. 거란족, 여진족은 중국을 약탈하고 장악한 것으로 만족했죠. 하지만 칭기즈칸은 서쪽 나라들과의 교역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 동서 교역의 중간에는 이슬람의 호레즘 왕국이 있었습니다. 칭기즈칸은 호레즘과 교역할 호의적인 마음으로 사신을 보냅니다.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호레즘은 칭기즈칸을 무시합니다. 호레즘의 최고 지도자인 술탄의 묵인 하에 칭기즈칸의 사신이 몇몇 무인들에게 살해당합니다.


 칭기즈칸은 크게 분노하여 혹독한 복수를 다짐합니다. 몽골기병들은 파죽지세로 중앙아시아를 넘어 호레즘 왕국을 유린합니다. “여자와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였다”고 전해질 정도로 철저한 복수가 이뤄집니다. 전성기의 국가도 칭기즈칸의 말발굽 아래 몇 년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유라시아 대륙을 누비던 칭기즈칸도 세월을 피해갈 순 없었습니다. 자신의 호레즘 원정에 참가를 거부한 서하를 다시 응징하던 중 병에 걸립니다. 병을 앓던 중에도 전쟁을 지속합니다. 뼈 속까지 정복가였던 그는 죽음마저도 전쟁 중에 맞이합니다. 서하 정복을 눈앞에 두고 '세상에 위대한 자신의 이름이 남을 것이고, 후세의 왕들이 자신을 칭송할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칭기즈칸의 군사력]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가위바위보도 매번 이기기 힘든 법인데 칭기즈칸은 어떻게 모든 전쟁에서 손쉽게 승리한 것일까요? 유목민이 거칠고 잔인하다지만 서하, 금나라, 호레즘 등 거대한 국가들을 불과 몇 년 만에 점령할 수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칭기즈칸 군사력의 비밀을 파헤쳐보겠습니다.   

  

 첫째로, 실력우선주의입니다. 칭기즈칸은 배경이나 혈통보다 철저히 실력을 우선했습니다. 다른 유목부족에서 장군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부족의 귀족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군사적 능력에 따라 장군에 기용했습니다. 

 몽골부족을 십호, 백호, 천호 등으로 십진제적으로 조직했습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수를 백호장, 천호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칭기즈칸 휘하에선, 배경이 시원찮더라도 전쟁에서 열심히만 싸우면 금방 천호를 다스리는 지위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기동력이 뛰어난 기마병이었습니다. 이들은 전쟁일 벌어지면 각자가 말 서너 마리 씩 끌고 다녔습니다. 타던 말이 지치거나 다치면 옆 말로 갈아탔습니다. 계속해서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었습니다. 말들은 식량이기도 했습니다. 전쟁 시 가장 큰 골칫거리가 식량 보급 문제죠. 많은 병사가 먹을 음식을 최전선으로 보내주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자칫 시일을 못맞추는 등 보급에 차질이 빚어지면 모두 굶어죽을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보통 군대는 식량 보급을 생각하며 조금씩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몽골군은 타던 말을 잡아먹으면 됩니다. 남는 고기는 육포로 만들어 오래오래 두고 먹었습니다. 보급 문제가 해결된 것이죠. 식량 걱정 없이 마음껏 전장을 누빌 수 있었습니다. 식량이 옆에서 함께 뛰고 있었으니까요.

 그밖에도 기마병의 무기가 효율적이었습니다. 가벼운 반달형의 칼을 사용했는데 상대를 베는 단면이 넓어 스치기만 해도 죽일 수 있었죠. 활도 1미터 안팎으로 짧았습니다. 덕분에 컨트롤이 쉬웠죠.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도 정확하게 활을 쏠 수 있었습니다. 


 셋째로는, 공동분배의 전통입니다. 몽골이 벌인 전쟁의 목적은 보통 약탈이었습니다. 영토와 사람을 정복하기보다 그곳의 물자와 자원을 빼앗는 것이죠. 전쟁 후에는 약탈물을 군인들이 공평하게 나눠가졌습니다. 열심히 싸워서 많은 것을 빼앗으면 나눠먹을 파이가 커지죠. 내 재산이 마구 늘어나는데, 얼마나 열심히 싸웠을까요?   

 마찬가지로  칭기즈칸도 약탈만 생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중국을 점령하고나서는 중국인을 모두 죽여 버리고, 초원을 만들어 말을 키우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렇게 됐다면 지금 중국엔 사람이 10억 명 사는 게 아니라, 말이 10억 마리 살고 있을 수도 있겠죠. 다행히 요나라 왕족 출신의 재상이었던 야율초재가 말을 기르는 것보다 중국인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세금을 걷는 게 훨씬 이익이라고 칭기즈칸을 설득합니다. 칭기즈칸은 그 말을 따르죠.          


 넷째로는, 칭기즈칸의 최정예 친위대 케식입니다. 케식이란 '은총 받은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칭기즈칸은 백호장, 천호장 등 장군들의 자식을 따로 모아 친위대로 만듭니다. 이들에겐 천호장보다 높은 지위를 주고 온갖 특권을 줍니다. 지척에서 칸을 모시고, 장군보다 높은 자리를 주니 이들이 목에 힘을 얼마나 주었을까요. 그만큼 칭기즈칸에게 충성을 다했을 겁니다. 칭기즈칸 입장에선 장군들의 자식을 인질로 잡아 두며, 장군들의 충성을 유도할 수도 있었으니 1석2조였겠죠. 이들은 전쟁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며, 대제국 형성에 크게 기여합니다. 



팟캐스트 방송으로도 <역사를 걷는 밤>을 즐겨보세요:)

  http://www.podbbang.com/ch/14711


매거진의 이전글 칭기즈칸, 가장 탁월했던 정복가(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