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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파르크 Oct 11. 2017

칭기즈칸, 가장 탁월했던 정복가(하)

동서교류에 기름을 붓다


[동서교류에 기름을 붓다]

 칭기즈칸이 죽고 나서, 그 넓은 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몽골 관습에 따라 아들들이 넓은 영토를 나눠 갖습니다. 하지만 최고 존엄 ‘칸’의 자리를 두곤 치열한 갈등이 있었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조 초기 왕위계승분쟁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조선 초기도, 태조 시기 왕자의 난을 두 번이나 겪으며 큰 내홍을 겪었지요. 몽골은  5대 쿠빌라이칸 때 이르러야 안정을 찾습니다. 중원을 다스리는 쿠빌라이와 나머지 4개국으로 정리됩니다. 갈등의 후유증으로 같은 몽골제국이라는 의식이 희미해지고 각자도생하는 분립적 경향이 강해집니다. 중원을 차지한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元)으로 바꾸고 세조라는 중국식 황제 칭호를 사용합니다. 수도도 북경으로 옮깁니다. 전통적인 중국식 국가를 지향합니다.     



 칭기즈칸의 정복지가 조각조각났지만 동서교류라는 파급효과를 낳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엄청난 교역망이 형성됩니다. 물자와 사람이 오가며 문화를 섞이며, 각 문명은 새로운 자극과 함께 발전합니다.



 특히 칭기즈칸이 만든 역참제는 교류의 핵심 통로였습니다. 전국을 10리 간격으로 역참을 설치해 관리나 사신에게 숙박, 식사, 말 등의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이곳을 이용하면 안전하고도 빠르게 여행이 가능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450km까지 주파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이곳을 오갑니다.     



 칭기즈칸의 60여 년 삶 가운데 대외 정복에 나선 것은 20여 년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흩어져 있던 몽골부족을 통일하는데 시간을 보낸 것이죠. 혹자는 칭기즈칸이 태어날 때 몽골부족이 통일되어 있었다면, 대외정복에만 집중해 당시에 알려진 모든 세계를 점령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랬다면 아프리카와 인도 저편까지 역참이 깔리고, 세계화란 단어가 1000년 전부터 유행하지 않았을까요? 






팟캐스트 방송으로도 <역사를 걷는 밤>을 즐겨보세요:)

  http://www.podbbang.com/ch/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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