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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파르크 Oct 12. 2017

사마천, 진정한 역사의 아버지(상)

 한 분야를 새로이 개척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기여를 한 사람에게 우리는 ‘아버지’라는 별명을 붙입니다. 예를 들어, 엄청난 작곡가였던 바흐를 두고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그렇다면 ‘역사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역사의 아버지라는 별명은 서양과 동양 각각 한명씩 있습니다. 둘 모두 각각 동서양 최초의 역사서를 썼습니다. 그래서 역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개척했습니다.     


 서양은 ‘역사’를 펴낸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입니다. 동양은 거세라는 궁형이란 가혹한 형벌을 받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눈치 채셨나요? 바로, 사기를 펴낸 사마천입니다.  

   

 엄청난 역사서를 펴낸 사람이라면 학식과 덕망 넘치는 사회 지도층 아니었을까요? 사마천은 어쩌다 그런 수치스런 형벌을 당한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얻게한 사기를 어떻게 완성한 것일까요. 사마천의 행적을 쫓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를 이은 역사 사랑사마담과 사마천]

 진시황이 죽고, 중국은 다시 혼란의 시대를 맞이합니다. 난세에 영웅이 등장하는 법. 이 때, 두 영웅 항우와 유방이 치열하게 패권을 다툽니다. 결국,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며 한나라를 세웁니다. 이 한나라 때, 역사의 아버지 사마천이 등장합니다.     


 사마천은 태사령 사마담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태사령은 황제를 지척에서 모시며 기록과 문헌을 담당하는 관직이었습니다. 사극을 보면, 왕 바로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붓을 들고 기록하는 사관을 본 적 있으시죠? 사마담도 비슷한 일을 했다고 보면 됩니다.      


 기록을 담당하고, 책을 관리했던 아버지 밑에서 자연스레 사마천도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만 권의 책을 섭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청년 시절에 역사 유적지를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그곳 어르신들께 옛 이야기를 수집하는 게 취미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공자의 고향에 찾아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자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남아있는 이야기는 없는지 물어본 것이죠. 또는, 유방과 항우가 전쟁을 벌인 곳을 찾아가 지형지물을 살피며 왜 유방이 이겼나를 고민해본 것이죠.     

아버지 사마담도 역사 사랑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한나라는 무제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한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무제는 봉선의식을 진행합니다. 봉선의식은 중국에서도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한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참고로 나중에 당나라 전성기 때 태종이 봉선의식을 하려하자 신하들이 ‘아직 폐하가..그 정도는..’하며 말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행사에 사마담은 참가하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하지만, 사마담의 마음도 모르고, 무제는 그를 봉선 장소인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게 합니다. 사마담은 정말 크게 낙심했다고 합니다. 봉선을 참여하지 못한 실망이 한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시름시름 병을 앓습니다.     


 사마담은 중국의 기원부터, 지금의 한나라 무제 시대까지를 다룬 역사서를 만들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역사는 경전의 일부로만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역사책이 없었습니다.  

 아직 꿈을 이루지 못한 사마담에게 죽음이 찾아옵니다. 그는 자신만큼 역사를 사랑하던 아들을 불러 유언을 남깁니다. 자신이 못 이룬 꿈, 역사서 편찬을 꼭 이뤄달라고 부탁합니다.



강한 의지로 가득한 얼굴의 사마천



[떨리는 치욕궁형]

 아버지 사마담이 죽고 3년 후,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됩니다. 다양한 문헌들에 푹 빠져 지냅니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의 유언을 잊지 않고, 역사서를 준비하던 사마천. 그에게 큰 시련이 다가옵니다.     


 역사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세겠죠.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에 파헤쳐, 그것들의 의미를 되짚어보던 습관 때문일까요. 사마천은 적당히 윗사람의 눈치만을 살피지 않고, 맞는 건 맞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꼿꼿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그런 성격이 화를 불러옵니다.     


 이릉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젊고 용맹한데다, 군사적 재능까지 뛰어났죠. 당시 한나라는 북쪽 초원의 흉노족과 잦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무제는 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흉노족을 싹 쓸어버리려고 했습니다. 때문에 전쟁이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죠. 젊은 장군 이릉은 흉노와의 전쟁에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매번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5천 여 명의 적은 병력으로 8만의 흉노군과 붙어야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거기다, 이릉의 군사는 모두 보병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흉노군은 모두 말을 탄 기병이었죠. 열악한 조건에서도 분전을 하다, 결국 이릉은 흉노군에 항복합니다.     


 흉노족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무제는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습니다.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릉의 항복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했습니다. 신하 모두들 화난 무제의 눈치만 살피며, 이릉 가족을 능지처참하자고 합니다. 이 때 사마천이 보다 못해 나섭니다. 비록 항복하긴 했지만,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싸운 이릉을 오히려 칭찬해야한다며 변호했습니다.  


 황제 눈치를 안보고 용감하게 던진 직언은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무제의 분노가 이릉에서 사마천으로 옮겨 붙었습니다. 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두고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50만 전을 바치거나 궁형을 당하라고 했습니다. 50만 전은 당시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고 합니다. 남은 선택지는 죽거나 궁형을 당하는 것이죠. 궁형은 거세 즉, 생식기를 잘라버리는 형벌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느니 명예롭게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마천은 눈물을 머금고 궁형을 택합니다. 사마천의 수치심, 치욕감, 모욕감,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친구에게 남긴 편지에 사마천의 분노가 잘 나타납니다.     



“형벌 중에 궁형(宮刑)이야말로 극도의 부끄러움을 주는 것입니다. …… 떨리는 치욕에 창자는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쥐어뜯는 것 같아 앉아 있으면 얼빠진 사람이 되고, 집을 나서면 갈 곳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마천이 친구 임안에게 쓴 편지 -







팟캐스트 방송으로도 <역사를 걷는 밤>을 즐겨보세요:)

  http://www.podbbang.com/ch/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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