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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hwan Mar 09. 2017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한다는 것 (1)

한국에서 그리고 실리콘 밸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겪은 차이점

한국에서 8년 정도, 그리고 미국에서 2년 정도 일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잊기 전에 간단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훗날에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마음으로 일했었고, 그리고 어떤 기분이 들었었는지 기억해내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개인적인 필요도 있고, 또 미국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보는 사람들에게도 작게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한번에 많은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몇 번에 걸쳐서라도 기록으로 남겨놔야겠다.  미리 주지하고 싶은 것은 어느 한쪽이 좋다거나 혹은 나쁘다던가 하는 것은 개인의 목적과 상황,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니, 필자의 개인적인 호불호에 관해서는 언급은 최대한 피하도록 하겠다.






"8~5 or 9~6 or Flexible Time"  vs  "None"


가장 먼저 출퇴근 시간에 대해서 비교해보고자 한다. 한국에서는 출퇴근 시스템을 '근태'라고도 한다.  내가 일했던 회사에서는 8~5제(8시에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하는 제도)를 사용해보기도 하고, 9~6제도 사용해보다가 - 아무래도 디자이너 조직이다 보니 근태 시스템도 디자이너의 개성을 존중하고 개인적인 용무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자는 차원에서 Flexible Time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었다.  출근을 오후 12시 전까지만 하면 출근 시간 기준으로 8시간을 근무한 뒤 퇴근할 수 있다는 내용인데, 초기에는 획기적이라 하여 매스컴에도 몇 번 기사화되기도 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Flexible'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최소 8시간을 채워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심지어 10시간이 넘는다고 해서 누가 말릴 사람은 딱히 없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에서 일하는 것은 어느 회사에서 일하는지, 어느 직종에 일하는지에 따라 경우가 다 다르겠지만,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 그리고 (주변으로부터 들은바)실리콘밸리의 IT분야에 한정지어서 이야기하자면- 딱히 근태 시스템이라는 것이 없다. 본인의 일이 많으면 일찍 와서 늦게 갈 것이고, 본인의 일이 없으면 적당히 왔다가 적당히 일찍 퇴근한다.  신기한 건- 아침 7시 혹은 8시에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어도 (아무리 늦게 출근해도) 6시 이후까지 남아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야근 없는 실리콘밸리?


근태 시스템도 없고 알아서 왔다가 적당히 퇴근하면 되면 업무강도는 어떨까.  야근도 없어 보이는데 한국에서 일할 때보다는 좀 '널럴'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는 출근해서 일을 하면 회의에도 여러 차례 참석하게 되고, 동료를 불러서 커피 한잔 하러 가거나 담배도 피우기도 하는 등, 업무 시간 외적으로 사용하는 시간이 많다 보니 늦게까지 남아서 야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가지 이유로 절대적인 업무량이 많은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이렇듯 충분히 제시간에 끝낼 수 있는 일들이었는데도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이런저런 이유로 확보하지 못해서 야근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같이 늦게까지 일하고 고생하다 보니 동료들과의 관계도 끈끈해지고, 흔한 말로 '사람을 얻는' 일은 많다. 


이곳에서는 일단 사무실에 앉으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회의도 며칠 전에 나에게 공지된 것이 아니라면 오늘 새롭게 추가되는 회의는 거의 없다.  커피를 회사 안에서 뽑아먹으니 어디 나갈 일도 없고...(실리콘밸리의 회사에 설치된 여러 복지환경이 좋은 것은 다 그런 이유다. '어디 가서 시간낭비 말고 필요한 건 여기 다 있으니, 여기서 해결하고 일해라' 라고) 점심 먹으러, 그리고 이따금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100% 일하는 시간이 보장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 끝내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밤늦게까지 끝내려고 혼자서 끙끙대기보다는 매니저와 이야기해서 장단기적으로 업무량을 조절해본다던가, 업무를 도울 수 있는 인력을 찾아본다던가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여유 인력이 여의치 않으면 야근을 하게 되는데, 회사서 남아서 하기보다는 (대부분 노트북을 사용하므로) 집에 가져와서 한다.  회사에 남아서 일하는 것은 '기특하게 늦게까지 남아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저 친구는 업무시간에 생산성이 떨어지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거나 '오늘 늦게 출근했었나 보지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게다가 저녁식사 시간은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므로, 혼자 늦게까지 회사에 있는 것은 이들 생각에는 좀 의아한 일이기 때문에. (아x존이나 우x 같은 몇몇 회사들은 한국 회사 이상으로 엄청나게 야근을 한다고 들었다)


다만,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보니 회사 동료들과의 관계는 아무래도 조금 피상적인 경우가 많다. 나처럼 외국인으로서 일하는 사람 중에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들의 경우에는 퇴근 후, 주말에 할 일이 없어서 외로워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외로움이 무슨 대수냐-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겪어봐야 그 힘든 기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젊은 친구들은 실리콘밸리보다는 즐길거리가 많은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처럼 대도시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오늘은 몸도 안좋은데 집에서 일해볼까...


재택근무 vs WFH


한국에서 재택근무라 하면 임산부나 육아로 인해, 혹은 개인 사정에 따라 미리 신청하고 (짧게는 몇 주간, 길게는 몇 달간) 집에서 일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하는데, 이곳에서는 근태처럼 '재택근무'라는 시스템이 없고, 그냥 '나 오늘 집에서 일할 거야'라는 이메일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 이메일 제목은 그마저도 성의 없는 WFH(Working From Home). 그래도 이메일을 보내주기라도 하면 성의가 있는 편이지, 아무런 notice 없이 WFH 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  나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자유로워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여태껏 누군가 자리에 없다고 딱히 불편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필요한 회의가 미리 공지되어 있는데도 WFH 하는 경우는 없고, WFH 하더라도 집에서 '진짜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팀원 간의 커뮤니케이션하기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회사에 나오느냐 WFH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업무에 생산성(Productivity)이 떨어지면 그것이 문제가 된다.




성과주의


어느 회사든 이윤 추구가 목적이듯이, 회사를 다니는 개인의 경우에는 회사가 벌어들이는 이익에 기여하기 위해 성과를 내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다. 한국에서나 이곳에서나 모두가 성과를 위해서 달리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팀'중심의 성과주의이다.  예를 들어 A, B라는 프로젝트가 있고, 각각의 프로젝트에 3명씩 배정되어 있으며 전체 팀 매니저가 있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A라는 프로젝트는 망했고, B라는 프로젝트는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면 팀 전체 매니저는 망한 A과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동시에, 성공한 B라는 프로젝트의 영광을 가지게 된다.  상대적으로 실제로 업무를 수행한 팀원들은 실패한 프로젝트에 대한 책임에서는 비교적 자유롭지만, 동시에 성공한 프로젝트에 대한 영예도 직접적으로 받기는 어렵다. (물론 실패는 팀원으로 돌리고 성공의 영광은 본인이 갖는 최악의 매니져들도 적지 않게 본 적이 있다만...)

이곳에서는 '개인'중심의 성과주의이다.  위의 같은 상황이라면, A프로젝트를 진행한 PL(Project Lead)은 책임을 져야 하고, B프로젝트를 진행한 PL은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프로젝트마다 PL 본인이 성과와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하기 때문에 일에 대한 열정이 따라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업무 부담감도 상당하다.  전체 팀 매니저는 프로젝트를 직접 진행하기보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PL의 업무를 조율하는 업무를 하게 된다.  팀 매니져에게는 프로젝트 자체보다는 좋은 PL들을 여럿 키워내는 것이 큰 성과가 된다.




보안(Security)의 중요성: 예방 vs 처벌, 그리고 생산성


예전에 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 같은 회사 다니는 친구와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만드는 최첨단 모바일 기기를 정작 우리는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만들고 있다"라고.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겠지만 회사 내에서 WIFI를 사용하지도 못했고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랜선(LAN)을 컴퓨터 뒤에 연결해야 했다.  그나마 사용했던 컴퓨터도 묵직한 데스크탑.  노트북을 사용하거나, 특히 디자이너들이 많이 사용하는 맥북(MacBook)을 사용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회사의 보안정책 때문이었다.  컴퓨터에 설치된 보안 프로그램만 해도 4-5개는 되고, 그것 때문에 컴퓨터 성능 저하되기 때문에 업무 생산성도 떨어진다. 하나의 예를 들면 내 컴퓨터에서 동료의 컴퓨터로 용량이 큰 파일 하나를 보내려면 회사 내 공유폴더를 사용하거나, 특정한 결재 경로를 통해서 보낼 수 있었다.  외부인이 회사에 방문을 하게되면 미리 방문 신청하고 입구에서부터 에스코트해야 했고, 퇴근 시에 소지품은 보안 탐색기를 통해서 내보내야만 했다.


여기서는 딱히 그런 거 본 적이 없다. 외부인이 자유롭게 회사에 드나들 수 있는 편이고(구글 다니는 친구가 페이스북 가서 점심 먹을 수 있다), 보안 탐색기는 천장에 달린 CCTV 외에는 없는듯 하다. 당연히 무선 인터넷 환경에서 일하게 되고 윈도우 PC든 맥북이든 본인의 업무 성격에 따라 사용하면 된다. 그러다 보니 업무 생산성도 자연스럽게 높아지게 된다.  물론 기본적인 보안 프로그램은 설치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사용자가 설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진 않다.


그러면 한국은 보안에 철저하기 때문이고 여기는 아니어서 그런 건가? 그렇지 않다.  한국은 보안이라는 개념이 '예방'의 차원이라면, 이곳에서는 '처벌'의 차원이다. 한국에서는 '회사 기밀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시스템'이 보안인 것이고, 여기서는 '기밀을 빼가는 사람이 다시는 업계에 발을 못 붙이도록 처벌하는 것'이 보안의 개념이다.  근데 흥미로운 점은 처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방이 된다는 점이고, 예방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시스템은 오히려 다수인 선의의 사람들에게 번거롭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여담이지만, 비단 IT분야에서 뿐 아니라 미국의 법 문화가 '처벌'의 스텐스가 강하다. 가령 한국은 과속을 방지하기 위해 곳곳에 과속방지 카메라가 설치되어있지만, 미국에는 카메라가 없고 이따금씩 경찰관이 곳곳에 숨어있다.  말 그대로 운나쁘게 걸리면 꽤 높은 액수의 벌금 및 그에 상응하는 처벌이 기다린다.




의사결정 과정


성과주의에 대한 관점이 다르듯이 의사결정 과정도 꽤나 다른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직급에 따라 의견이 나뉘게 되면 높은 직급의 의견으로 좀 더 기우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다 보니 승인받기 위해 높은 직급의 의견대로 디자인 작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잘 안될 경우에도 책임은 높은 분들이 지게 될 테니까.  그리고 중간중간에 보고(Report)하는 시기도 리더십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그러다보니 의사결정 과정은 신속하게 진행되고 일의 속도가 빨라지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한번 결정된 내용도 더 위의 리더십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게 되면 일의 진행이 뒤바뀌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겪었던 의사결정 과정은 리더십의 의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면, 이곳에서의 의사결정 과정은 끊임없는 비판과 논쟁, 설득의 연속이다.  작업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옆팀의 사람들도 함께 참여해서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모습들은 흔히 보이고, 심지어 싸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지만 의사결정 후에는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잘 지내기도 한다.  아무래도 '과장님', '차장님'하고 부르는 문화가 아니라 CEO마저도 전부 서로 이름을 부르는 수평적인 구조이다 보니까, 팀장급의 의견에 신입 인턴이 반대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구라도 서로의 의견을 쉽게 나누고 논쟁하는 것이 주된 문화이다 보니까 한국에 비해서 일의 진행 속도는 더딘 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번 결정된 것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쉽게 뒤바뀌는 법은 없어서 전체적으로 봤을때 속도가 느리다고 할 수도 없다.


의사결정 과정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윗사람의 의견이나 동료의 의견대로만 따라가면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관이 없고 수동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쉽다.  질문하고 나의 생각을 주장하며 논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동양인들에게는 분명 낯선 풍경이지만, 이곳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틀을 벗는 노력을 해야 한다.



s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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