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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ry J Aug 16. 2022

아줌마! 비키세요!

지하철 3호선에서의 공정과 상식

지하철을 탔다.

지쳐 보이고 구부정한, 한 줌밖에 안 되는 노인이 비어있는 포대자루 꺼지듯 고단한 한숨과 함께 임산부석에 앉았다.

앉자마자 한 젊은 여인이 그 앞에 위협적으로 섰다. 송곳이 귓등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표창 내리꽂듯 사납게 말한다.

“아줌마! 아줌마 임신했어요?”

몹시 당황한 할머님(내 눈엔 할머님)에게서 겨우 비어져 나오는 대답  “아니요..”

“전 임신했어요. 비키세요”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허둥지둥 일어나며 “그냥 좋게 물어보시지.. 무섭게..”라고 민망함 담아 중얼거리는 할머니에게 “그래서 제가 물어봤잖아요. 임신했냐고”

좋게 물어볼 수 없었냐는 소심한 항변에 웬 동문서답인가 생각하며 또 한 번 죄 없는 내 얼굴에 열기가 지나갔다.

그 할머니는 곧 다른 칸으로 도망치듯 사라지셨다.


마땅한 자기 자리를 차지한 이 대견한 임산부는 곧 커다란 쇳소리로 통화를 시작했다.

임신을 했는데도 남편이 도와줄 생각을 안 해 점점 낳을 마음이 없어진다는 친구와의 통화.


같은 지하철 같은 칸에 탄 죄로 모르는 젊은 여인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강제로 들어야 하는 처지에 속이 안 좋을 지경이다. 할 수 있는 게 이어폰 볼륨을 최대치로 올리는 것 밖에 없다. 엄마가 자기를 낳을 마음이 없어져 간다는 걸 지하철 몇십 명 승객과 함께 듣고 있을 그 여인 뱃속 아기가 안쓰럽기도 하다.  


이어폰 볼륨이 너무 커 귀가 먹먹한 상태로, 몇 년 간 지치도록 듣고 있으나 뭐가 뭔지 도저히 모르겠는 단어들이 생각난다.

공정과 상식. 뜻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처음으로 부질없이 사전을 찾아보았다.

<공정> 공평하고 올바르다

<상식>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어난 일을 감정 없이 결과만 바라본다면 이렇다.

할머니는 임산부석에 앉으면 안 되는 거였다. 상식에 어긋나는 결정이다.  

그리고 임산부는 대중교통 이용 규율이 자기에게 부여한 당연한 권리를 사수했다. 공평하고 올바른 결과-임산부가 임산부석에 앉기-를 얻어냈다.

그런데 이 상황에 그 여인에 의해 공정이 실현되었다고 말하고 돌아서기는 내내 찜찜하다. 


공정과 상식, 이런 말들은 애초에 이 세상이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님을 전제로 한다.

나 혼자 사는 세상이면, ‘내’가 ‘남’들에 비해 우스운 꼴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공정과 상식이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다. 옷을 입지 않아도 되고, 줄을 설 필요도 없는 나만의 세상에서 어떤 상식이 필요하겠으며, 경쟁할 대상조차 없는데 무슨 공정이 필요할까.

동물보다 조금 나아야 하는 존재로서, 남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종족이니 이 번거로운 공정과 상식도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공정과 상식을 얻어내는 과정과 방법 또한 그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남과 함께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남에 대한 이해와 남에 대한 헤아림을 모두 내던지고 지르기만 할 구호가 아니다. 그런데 왠지, 이 흠잡을 데 없어  지루하기까지 한 가치의 실현이, 과정과 절차, 상황에 대한 가늠 없이 불쑥 결과만 들이대는 쪽으로 간다. 그런 세상이 된 지 이미 너무 오래다.


과정과 절차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히 가정과 학교의 몫이다. 교육이 해야 한다.

어떤 결과를 이루어 내든 간에, 남과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불변의 배경으로부터 시작해서, ‘올바른 사고’에 의한 절차와 과정이 ‘올바른 언어’로 구현되어 논의될 수 있도록, 이 모든 중간과정의 가치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 교육이 해야 할 일이다.

실용적 가치가 미미하여도 과정에 담는 진심이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분야, 예술분야의 할 일을 좀 더 심각하게 들여다보아 주어야 하는 것도 그래서 제발 교육계가 할 일이다.


지하철에서 그 여인의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을 들어준 승객들은 원치 않는 남의 사생활을 듣지 않을 개인의 정당한 권리를 모두 쉽게 포기했다. 누구도 이런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런 여인에게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하는 ‘교육’을 시행해봤자 오물을 뒤집어쓰는 꼴을 당하고 말 거라는 걸 이미 세상 교실에서 ‘학습’했기 때문에. 그리고 ‘남’ 일에 나서서 좋은 일은 없다는 것도 이미 수없이 직. 간접 ‘복습’했기 때문에. 지하철 모든 승객은, 당연히 나도, 그저 이 광경을 하나의 해프닝으로 보고 넘긴다. 넘길 수밖에 없다.


가정과 학교가 제 할 일을 다해줬다면 임산부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주머니, 제가 임신했는데 이 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받은 공격이 없는 할머님이 이렇게 말해주시기를 바래본다. “아 미안합니다. 제가 너무 피곤해서 잠시 앉았어요.”


결과는 할머님이 사나운 말로 내쳐졌을 때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과정은 분명 다르다.

그 다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세상인가 할 때마다, 새어 나오는 가늘고 긴 한숨을 막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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