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기록 1 - 2014년의 JY
내가 맡은 1학년 학생 중에 피아노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남자아이가 있다.
입시곡이 지정곡이 아니라 베토벤 소나타 하나, 쇼팽 에튜드 하나 이렇게 광범위하게 나오다 보니, 남보다 오랜 기간 될 때까지 같은 곡만 연습해서 어떻게든 입시를 뚫고 들어오는 아이들이 간혹 있는데, 이 아이가 그랬던 것 같다.
이 남학생은 불행 중 다행으로 피아노가 너무 좋은데 음악이 하고 싶은걸 늦게 알아서 막판에 뛰어든 케이스라, 하고자 하는 태도는 더할 수 없이 좋다. 언제나 지나치다 싶게 예의 바르지만, 그 안에 어떤 가식도 없고, 굳이 지도교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는 순박한 아이다.
동기들 중에 가장 많이 연습하기로 유명하고, 선생으로서 이 아이가 음악에 '감'이라는 것이 있구나 파악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죽어라 연습하긴 해도, 같은 곡을 오래 쳐서 입시를 치렀던 아이인지라, 한 학기만에 뭐가 잘 되어 줄 리는 없다. 시험이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그렇게 고전하는 걸 보고 판단은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오늘 마주 앉아, "나는 네가 여기까지 해낸 것만도 참 고마운데, 혹시 이번 시험은 다음 학기로 미루는 게 어떨까" 물었다.
“시험은 정말 보고 싶어요” 한다.
“내가 걱정하는 건, 시험을 잘 못 보는 것보다는(시험을 잘 못 보는 건 기정사실이다) 네가 시험 보고 나서 다른 시니어 교수님들께 혹시 험한 소리 듣고 상처받을 수도 있고, 잘 안되면 실망할 수도 있는데, 그게 극복이 안될까 봐. 그럼 피아노가 싫어지거나 두려워질까 봐” 하니 이 아이가 생각지도 못한 긴 대답을 한다.
“교수님, 저는 어차피 일찍 시작한 남들보다 한계가 있잖아요. 저희 엄마도 항상 똑같은 것을 걱정하시긴 하는데요, 저는 험한 소리 듣고 상처받는 것도 제가 다 겪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저는 아무것도 겪은 게 없어요. 빨리 어떤 경험이든 쌓고 싶어요”
진지하게 대답하는 열여덟 살 어리디 어린 내 학생의 어리지 않은 대답을 들으며, 뭔가 내 자신이 어리석고, 이 아이가 가슴 깊숙이 예쁘고 아프고, 기특하고, 반쯤 눈물 날 것 같다.
바빠 죽겠는데, 좀 있으면 리허설 팀이 들이닥칠 텐데, 한 10분만 조용히 앉아있자 하고 생각해보고 있다.
예중부터 박사학위까지 (나름 내 고민과 고통의 크기가 얼마만 했든 간에), 남보기에 시간적으로는 일사천리로 밟아온 코스를 끝내고 난 후, 또 나처럼 일사천리 코스를 밟는 아이들만 가르치고 있었더라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어떤 것들을 요즘 우리 학생들을 통해 자꾸 이해하게 된다. 9년 전 귀국했을 때의 나에게 이 아이를 만나서 어떻게든 가르쳐보라는 미션이 떨어졌다면 난감했을 것도 같다. 물론 정직하게 말해서 아직도 당황스럽거나 답답해서 가끔 울컥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냥 포기하겠다 이런 맘은 한 번도 들지 않는다. 내 학생들 중 음악을 시작한 지 가장 얼마 안 된 학생이지만, 음악을 수줍게 사랑하는 마음이 가장 깊은 아이임이 전해지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마음을 보는 즐거움이 답답함을 덮고도 남는다.
그래, 이런 대답을 해준 너에게 나는 두말하지 않겠다.
“네가 그런 마음이면 시험은 보는 걸로 하자. 씩씩하게 보는 걸로. 나는 열심히 응원하고 있을게” 하니 “네 고맙습니다!” 하고 예의 그 곰돌이 미소를 휘날리며 나간다. 그 뒷모습에 내 하루가 얼마나 보상받았는지, 너는 조금이라도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