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기

전역

구름 너머 어둠을 가르는 아침노을은 청춘의 표상이다.

by 박제원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유년 시절의 공상에 빠져든다. 빗속을 걸을 때면 설레는 어린 마음이었다. 바닥을 보면 웅덩이에 무지개가 떠 있었다. 고개를 들면 산마루에 앉은 구름을 볼 수 있었다. 그때는 구름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갓 구운 빵처럼 푹신한 촉감일지, 아니면 어머니 품 속처럼 마냥 따사롭고 포근할지. 많은 시간이 흐른 이제는 안다. 웅덩이에 뜬 무지개는 상가에서 흘러나온 역한 기름띠라는 것을. 산 위에 뜬 구름 속에는 군인들이 산다는 것을.


나는 떨어지는 빗속에서 훈련단에 입소하던 그날의 나와 마주한다. 알 수 없는 심연에 뛰어들던 그 순간, 이슬비는 내렸다. 최용덕 관을 지나치던 발걸음은 왜 그리 처량했을까? 그러나 의외로 훈련단은 그리 끔찍하진 않았다. 미화된 회상일진 모르지만 되려 즐거웠다. 훈련이 끝나고 동갑내기들과 지친 몸을 뉘어 도란도란 떠든 기억. 같은 공포를 공유하지만 숨긴 채 미소 짓던 기억. 헤어짐을 알고 만나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을 나눈 기억. 잊을 수 없는 사랑스런 추억이다. 어쩌면 다가온 두려움을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자대에 전입하며 나는 그 두려움과 직면했다.

신병으로서, 아니, 군인으로서 부대에 있노라면 복합적인 감정이 들곤 한다. 이 [복합]이라는 단어에는 분노, 설움, 비탄, 향수, 무력(無力) 등의 감정이 내재한다. 이는 이미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집합체에 융화되어야만 하는 이방인이 으레 겪는 고독이다. 거기에 도저히 거부할 수도 반항할 수도 없이 무겁게 짓누르는 수직적 권력관계가 결합된. 그래도 병사에 의한 고통은 2달 정도 만에 극복해 냈다. 그러나 전역하는 순간까지 벌어지는 간부와의 갈등, 체제에 대한 반발심, 사회에 갖게 되는 박탈감, 잠을 향한 불친절한 침범, 특히, 1년 9개월이라는 겁의한 시간의 영상은 끝까지 나를 따라온 시련이었다. 길 위로 드리운 구름에 나는 비틀거렸다.

그럼에도 군대에서의 시간이 마냥 괴로웠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답하겠다. 단절된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각별한 감정이 있다. 가령 같은 시련을 겪는 동기들과의 일체감,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전우애(엄밀히는 우정) 혹은 친했던 선임을 떠나보내며 생기는 씁쓸함과 후련함의 양가적인 감정이 그렇다. 나를 닮아가는 후임들을 볼 때도 자못 흐뭇했다. 뇌리에 스치는 반가운 이름들이 머잖아 고요한 향수로 변모하리라는 점을 생각하면 마음속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듯한 아픈 기분이 든다. 돌이켜 보면 고되던 날보다 웃음 짓던 날이 더 많았던 것도 같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걸 알기에 외려 그립다. 이제서야 그립다면 너무 늦은 깨달음이 아닐까. 왜 나는 항상 깨달음이 느릴까? 아아. 나열할 수 없는 소중한 추억들이 날 괴롭게 만든다. 두고 온 내 가여운 순수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외로운 여느 밤이면 허탈히 미소 지으며 작별한 그날들을 은연히 회상해 본다.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요 보람이다. 그 괴로운 행복들은 이렇게 내 힘이 된다.


결국 내가 보낸 시간은 어떤 의미였는가. 나는 성장했을까. 시간이 흐름에 괴로움은 책임감으로 치환됐다. 즉, 시간이 내게 권위를 선사했다. 적어도 나만은 그 시절의 어느 병장처럼 인간성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아아. 나로 인해 힘겨워한 이가 없고 오히려 다들 내게서 도움을 받았던 것이라면 좋겠다. 그 구렁에서 내 역할을 잘 해낸 것이기를 바란다. 소중한 사람들의 평안한 밤이 내가 초소에서 지새운 밤에서 비롯되었기를. 그리하여 내 정신의 고뇌, 불면의 밤, 젊은 날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기를. 내 고통이 무가치하지 않았기를.

풀려난 걸까, 쫓겨난 걸까. 이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다. 밖에는 비가 온다. 창살을 두들기는 빗소리는 날 애수로 적신다. 붉은 가로등이 비에 물드는 골목을 비춘다. 머잖아 동녘이 트일 것임을, 봄이 올 것임을 나는 믿는다. 다가올 아침을 마냥 기다리지만 그러나 밤이라고 미울소냐. 때로는 어두운 날이 더 애틋한 법이다. 떠나온 나의 구름을 향해 새벽의 복판에서 경례하겠다. 구름 너머 어둠을 가르는 아침노을은 청춘의 표상이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2년 전에 목 놓아 부르던 그 노래를 조용히 읊조려 본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2023. 4. 24 - 2025.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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