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백야에서 나는 결국 잠들 수 없는가?
지방 사람들에게 서울 상경이란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내게 있어서의 서울은 텅 비어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사람에게는 항상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관념적 공간이든, 물리적 공간이든 간에 우리는 발을 뻗고 싶어 하는 강한 욕구가 있다. 일찍이 작가 최인훈이 말한 밀실의 비유가 적절하진 않더라도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관념의 밀실은 한 뼘이 채 안 되는 전자기기에 처절하게 유린된 지 오래다. 그런가 하면 물리의 밀실 - 광장이랑은 묘하게 뉘앙스가 다른, 심리적이면서도 관념보다는 물질적인 공간을 상정한다 - 은, 여기 서울에서는, 타인에게 침범당하여 무심히 짓밟힌다는 말이다. 기지개를 켜기 위해서는 남의 밀실을 열어젖혀야 한다. 강제로 부대껴야 하는 서러움. 그러니 서울 사람들의 표정이 밝을 리 있나. 밀집당하기에 우리의 정신은 너무나 광활하므로 멜랑꼴리(우울감보다 멜랑꼴리가 더 있어 보인다.)는 전염된다. 그리하여 그 어느 곳보다도 빽빽한 서울이 역설적으로 텅 비어버린 느낌을 준다.
확실히 고향이나 차라리 군대에서마저 느낄 수 없던 공허함이 서울에는 있다. 고향의 물 맑고 산 깊고 공기 좋은, 인적 없는 땅에서 살다가 이렇게 서울로 와버렸다. 서울의 밤은 강화의 낮보다 눈부시다. 끝없는 백야에서 나는 결국 잠들 수 없는가? 불면의 밤과 피로의 낮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밖으로 나선다. 속칭 '어깨빵'과 새치기를 헤집으며 영등포역에 나서면 마주할 바닥에 나앉은 노숙인들. 아무 일 없는 듯 (엄밀히 말하면 아무 일도 없는 게 맞다. 약자를 돕기에 우린 너무나 약하다. 무력의 직시보다야 무지의 인정이 차라리 마음에 이롭다.) 지나가는 사람들. 길거리에 사람은 언제나 많은데, 누구도 웃지 않는다. 사람이 너무 많은 탓일까, 번화가인 탓일까. 침해하고 침해당하며 인파 속을 표류하는 도시인의 슬픈 숙명을 안은 채 이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군중들에 끼인 채, 회색 숲에 갇힌 채 살아가야 하는 내가 있다. 밝게 드리운 백야의 간판을 피하여 흑야를 찾고자 나는 방으로 돌아온다. 빛을 가리고자 암막을 치기 전, 창 밖을 내다보자니 문득 외로워진다. 가슴 어딘가를 꿰뚫는 무의미성, 외로움. 그리고 허무함.
그러나 이런 감정에 매몰되어 니힐리즘에 잠식되는 것 역시 몹쓸 일이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내 지난 길을 회고해 본다. 그리운 유년 시절이야 가슴에 묻어두고서라도, 사실 1학년 시절은 살짝 후회되는 감이 없지 않다. 비록 코로나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 그것이 공부든, 인간관계든, 자기 계발이든 간에 - 는 후회. 너무나 게을렀다는 후회.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볼까. 흔히들 나태함이 사람을 망친다고들 하지만, 결국 이 역시 나를 결정짓는 성질 중 하나라고 위로하자면, 내 부끄러운 면모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으랴. 어떻게든 고치려는 노력은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나태한 나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극복하는 것이다.
극복. 사람이 언제나 기쁘고 풍족하게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 행복한 순간이 있다면 불행한 순간도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시인 백석의 말마따나 우리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난 것일까. 그러나 불행이 곧 어떠한 대상 - 특히, 자신 - 을 향한 원망으로 이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다. 불행이 있기에 행복이 있다. 한계가 있기에 극복이 있다. 이 반대되는 성질들은 서로를 위하여 존재한다. 우리는 오늘에 절망해 내일을 포기하고, 오늘에 도취돼 내일을 잊고는 한다. 그래서는 안된다. 인생은 디지털이 아닌지라 멈출 수 없다. 찰나는 피할 수 없다. 다가올 미래를 언제나 각오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행복한 순간의 불안감을 우리는 안다. 영원은 우리의 것이 아니므로, 결국 우리는 완전히 행복해질 수는 없다. 차라리 깨어짐을 직감한 행복보다야 행복을 직감한 깨어짐이 더 나은 상태라고 단정 짓는 것은 괘씸한 논리적 비약일까?
이 가혹한 깨어짐 속에서 나는 단언한다. 극복은 하나의 전염병이다. 도시인들은 멜랑꼴리를 전염병으로 안고 산다고 말한 바 있지만, 어찌 사람이 해로운 것만 나누며 살까. 전염되는 극복의 기운을 나는 군대에서 경험한 바 있다. 나와 내 동기는 서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아가며 결국 서로가 스스로 극복해 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끈끈한 일체감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어련히 힘들더라도 서로를 보며 우리는 극복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니, 새삼 내 인복이 좋았음을 실감한다. 내 극복에는 모두 사람이 있었기에.
서울이 내게 있어서 멜랑꼴리의 도시가 아닌 극복의 도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