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기

겨울

by 박제원

눈이 녹고,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잎이 지며, 눈은 왔다. 추위로 시작한 내 정든 한 해에 다시 차가운 성에가 어린다. 첫눈이라는 포근하고 사랑스러워 마땅할 단어가 무색하듯 세상은 무자비한 겨울에 휩쓸렸다. 절정으로 다다른 우리의 시간에 무지개는 강철로 하여금 걸렸다. 날카로운 바람과 시린 눈 속에서 비틀거리던 나는 현실을 잊어버리려는 듯 아득한 상념에 잠겼다.

냉혹한 날씨가 나를 괴롭힌다. 귀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고, 손가락이 말을 듣질 않는다. 확실히 겨울이란 무릇 증오해 마땅한 계절이다. 추위에 웅크리는 우리의 어깨와 색채를 잃어버린 세상의 빛을 위하여 나는 겨울을 미워해야만 한다. 한없이 매정한 겨울의 시커먼 먹구름을 나는 두려워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그럴 수 없다. 이 미운 계절에 침을 뱉어버리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매서운 첫눈을 온몸으로 만끽해 버리고야 만다. 내심 설레고 심지어는 포근한 마음까지 든다. 나는 왜 이리 한기가 반가울까?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마주친 계절이 겨울인 까닭일까? 아니면 원체 여름의 강렬한 햇빛을 고통스러워하는 까닭일까? 하지만 이런 유치하고 이분법적인 논리로는 좀처럼 증오를 사랑으로 바꿀 수 없다. 부끄럽지만 증오가 사랑보다 쉽다는 관념이 내게는 있다. 몸의 고통보다 커다란 마음의 사랑이 솟아나는 내 심리의 기저에는 보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동상에 흥분을 느끼는 마조히즘이란 내게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나는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눈을 맞으며 방황하던 내 머리에 어떤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몹시도 사랑스러운 추억. 문득 어떠한 깨달음이 생겼다. 괴로움 속에서 더 각별해지는 사랑이 있음을. 내가 한기를 사랑하는 것은, 내 인생의 즐거움들이 거진 추위 속에서 이루어진 때문이라는 것을. 하얗게 변한 세상은 추억을 위한 한 폭의 도화지가 되어 나를 깊은 생각 속으로 이끌었다.


유치원에 다니던 작은 나를 등에 업고 눈보라를 뚫으시던 아버지의 넓은 등.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보이던 든든한 어린 형과 함께 동네 뒷산에서 썰매처럼 타고 내려온 낡은 비료 포대. 첫눈으로 들뜬 우리들을 애써 수업에 집중시키시려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새로운 친구를 기대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새 학기 반 편성을 설레하던 방학의 끝자락. 모두와 같은 마음이기에 공포를 잊을 수 있었던 수험생 시절의 두꺼운 교재들. 난로가 고장 난 가운데 친한 선임과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악몽을 지새운 작은 초소. 그리고 머리에 눈을 묻힌 채 나를 보며 미소 짓는 어여쁜 연인. 아! 나는 이 모든 날이 사무치게 그립다. 귀가 떨어질 것만 같은 추위와 입김 속에서 나는 기쁘게 눈을 맞는다. 몇 해가 지나가건, 겨울의 한가운데 서 있으면, 추억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겨울에 이루어진 사랑스러운 기억을 나는 언제나 그리워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기억일까, 아니면 겨울일까? 이 기억에서 겨울을 분리하는 것이 합당할까? 차마 그럴 수는 없다고 홀로 결론을 내려본다. 이성과 논리보다는 마음으로 온몸으로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모든 게 끝나가는 겨울을 사랑하고 모든 게 시작되는 겨울을 사랑한다. 육체의 자그마한 괴로움보다야 포근한 마음의 즐거움이 더 커다랗고 정겹다.


추위가 익숙해질 즈음이면 정든 올해가 떠나갈 것이다. 새해라는 단어에는 특이한 향기가 있다. 이 향기에서 나는 두 가지의 감상을 느꼈다. 먼저, 까맣게 어둠이 내린 가운데 화려하게 빛나는 크리스마스처럼 밝고 설레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오후 5시에서 7시 즈음의, 귀가 시리고 살짝 구름이 껴서 하늘이 보라색에서 진청색 사이의 색으로 물든 애틋한 분위기가 있다. 나는 후자의 아련한 분위기가 좋다. 이 분위기 속에서 나는 겨울이란 이별의 계절임을 새삼 느낀다. 1년을 떠나보낸다는 것이 단지 시간의 교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간 만난 인연과 기억이 멀어진다. 때로는 따분하기만 했던 우리의 일상이 하나의 그리움이 되어 훗날의 안줏거리로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되고는 한다. 물론 일상의 일부는 흩어진 파편으로서 다시 만날 수는 있다. 운이 따라주기만 한다면야 찬란했던 우리의 한때를 마치 연극처럼 황홀히 재현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일상의 부활이 아닌 과거의 모방, 내지는 새로운 기억의 창조다. 돌아오지 않을 우리의 매일을 알기에 이 시기마다 콧잔등은 시려진다. 뇌리에 스치는 반가운 순간들이 머잖아 고요한 향수로 변모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속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듯한 아픈 기분이 든다. 아, 이 가냘픈 센티멘탈리즘이여! 하지만 애잔함이 슬픔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붙잡을 수 없기에 소중한 것들이 있다. 우리는 일상의 교체로 하여금 따분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과 젊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시인 윤동주의 산문에서처럼, 우리는 서리를 밟으며 굳은 얼음을 각오하는 것이 아닌, 서릿발에 끼친 낙엽을 밟으며 멀리 봄이 올 것을 믿는다.


아마 다시금 찾아올 봄과 여름, 가을 속에서도 나는 아마 겨울을 오매불망 기다릴 테다. 나는 내게 찾아올 시간이 즐겁길 바라고, 또 살아오는 동안 즐거움은 늘 내 곁에 있었다. 하지만 그 언제나 행복하기란 말처럼 쉽지는 않다. 내가 칠면조도 아니고, 여태껏 즐거웠다고 앞으로도 즐거우리라는 귀납의 오류를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령 요즘처럼 추운 겨울의 어두운 밤에, 흰 눈을 밟으며 걷고 있노라면 겨울을 애정하는 나조차도 그 깊은 냉기 속에 빠져 익사할 것만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심연 속으로 끌고 간다. 만약 앞으로 내게 남은 길이 절망과 상처에 얼룩진 가시밭길이라면, 내지는 더 나아가 내 세상의 종말이 찾아와 기쁨, 슬픔, 쾌락, 고통, 우정, 선, 악,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흰 눈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따위의 생각이 든다. 어쩌면 지금 밟고 있는 이 눈이 내 마지막 눈일지도 모른다. 상상하기도 싫다. 그러나 그런 최악의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지금의 내게는 그 어떤 방법도 없음을 나는 안다. 이 무의미한 걱정 속에서도, 다만, 나는 겨울의 품에 포근히 안겨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속에는 과거는 결정되었고, 미래는 내 자유라는 얄팍한 철학이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간을 기억과 희망이라는 요소로만 환원시키는 민망한 낙관주의다. 여태껏 나를 만들어 온 소중한 기억이 어깨가 무거운 어느 날의 나를 위로한다. 언젠가 내게 찾아올 인연과 희망이 어두운 순간에 놓인 나를 지켜준다. 그렇기에 나는 이 마음에 몸을 맡기고 매 순간에 감사하며 내 앞에 놓인 흰 눈을 한 발자국씩 소중하게 뽀드득 뽀드득 밟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겨울을 아끼며 순간을 살아가면, 시간이 흘러 소복했던 눈이 갈색빛을 띠다가 쓸쓸히 사라지더라도 나는 눈물짓지 않는다. 인연과 사랑과 희망과, 특히, 기억과 함께이기에 겨울은 춥지 않고 외려 따스하고 아늑한 것이며 다만 세상의 이웃들이 나와 같길 소망할 뿐이다.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눈은 나리고 하루는 끝나간다. 어둠이 내린 거리를 하얗게 밝히는 것은 가로등일까, 아니면 눈일까? 하루는 끝나가고, 한 해는 끝나가고, 어쩌면 이렇듯 우리의 생도 금방 끝나갈까? 나는 의문 - 왜 나는 그리도 겨울을 그리워했는지 - 을 풀었지만 새로운 많은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있다. 바로 곧 있으면 구름이 걷히고 동녘이 트인다는 사실이다. 머잖아 봄은 온다. 그렇기에 나는 이 미운 겨울을 미워할 수가 없다. 미운 겨울을 미워할 수 없듯 미운 기억들도 미워할 수 없다. 계절이 돌고 돌아 한 해를 이루듯 행복과 불행은 끝없는 되풀이 속에서 나를 이룬다. 후회뿐인 삶을 삶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후회 없는 삶도 삶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문득 생이 사랑스럽다. 생이 터무니없이 사랑스럽다. 앞으로 어떤 추억과 어떤 후회가 나를 기다릴까. 이번 겨울은 또 어떤 그리움이 되어 나를 지켜줄까. 하지만 괜히 의식하진 않겠다. 다만 그저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만끽하자. 보고 싶어질 풍경이다.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잎이 지며, 눈은 왔고, 다시 싹이 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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