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윤리의 회복 - 2장 윤리의 토대

by 박카스

폴 콜리어 『자본주의의 미래』 : 제2부 윤리의 회복 - 2장 윤리의 토대 : 이기적 유전자에서 윤리적 집단으로




현대 자본주의는 우리 모두를 전에 없던 번영으로 끌어올릴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윤리적으로 파산한 채 비극의 길로 향하고 있다. 인간은 목적의식을 필요로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것을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는 그렇게 할 잠재력이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올바른 목적은 광범위한 대중의 번영을 실현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번영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성공적인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번영을 누릴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과 존중을 느낌으로써 만개한다.


이 장에서는 우리의 윤리가 어떻게 우리의 감정과 연결되어 있고, 그것이 어떻게 진화하며, 또한 어떻게 잘못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욕망과 “의무”


실용주의 철학은 그 기원에서부터 공동체를 중시하고, 우리의 행동이 공동체의 가치와 상황의 구체적인 맥락에 적합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윤리의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도출하기 위해서 실용적인 사고를 사용해야 한다.


실용적인 사고는 이데올로기를 배격한다. 다른 모든 가치를 제압하고 절대적인 만고불변하는 단 하나의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현실의 공동체에서 서로 다른 가치들의 상대적 중요성은 진화한다. 실용주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이 효력을 발휘할 개연성이 가장 큰가?”를 묻는다.


반면에 이데올로기들은 저마다 이성으로부터 도출된 최고의 권위를 주장하며 자신과 뜻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러한 최고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는 가장 현명한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전위대이다.


종교 근본주의자들은 궁극적인 권위로 신성한 유일 존재를 내세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수직적 지휘 계통에 따른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내세운다. 공리주의자들은 개별적 효용의 총합을 내세운다. 롤스주의자들은 그들 스스로 정의하는 “정의”를 내세운다. 실용주의는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대중 영합주의에도 반대한다.


이데올로기는 풍요로운 인간적 가치들을 무시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모종의 “이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한편, 대중 영합주의부터 정책으로 한걸음에 내달린다. 실용적 사고와 긴밀하게 맞물리는 우리의 가치는 가슴과 머리를 결합한다. 대중 영합주의는 머리가 없는 가슴만을 들이밀고, 이데올로기는 가슴이 없는 머리만을 들이민다. (박카스 曰 :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가치나 이념만을 절대화해서 다른 가치들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려는 경향이 있다. 종교 근본주의자는 "신의 뜻"을 절대 진리로 여기고, 마르크스주의자는 "계급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일한 해법으로 본다. 공리주의자는 "가장 큰 행복"만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롤스주의자는 그들만의 "정의"를 절대 기준으로 세운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복잡하고 다양한 인간의 가치들을 하나의 원칙 아래 줄 세우려고 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개인의 실용적인 사고의 역량을 미심쩍어하는 경향이 가장 심한 정치철학자들은 제도로 구현된 축적된 지혜를 선호한다. 이것이 보수주의다. 반대로, 그러한 의심이 가장 약한 정치철학자들은 개인의 실용적 사고 역량이 펼칠 자유를 선호한다. 이것이 자유주의다. 서로 중시하는 것이 다른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근거가 탄탄하다. 답은 둘 사이의 균형이다.


호혜성의 출현


호혜적 의무는 행복에 결정적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생길까? 어떻게 설명하든 사회의 진화 과정과 맞아떨어지는 설명이어야 하고, 호혜성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갈망과 가치도 고려해야 한다.


이기적 유전자는 이기적 인간을 만들지 않는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길은 오직 집단 속의 협력이었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자연선택은 합리적인 경제적 남성을 솎아내고 합리적인 사회적 여성을 우대했다. 우리는 타고난 본성상 먹을거리뿐 아니라 소속과 존중을 갈망한다. 그러나 대다수 구성원이 수용하는 공통 가치는 어디에서 생길까?


규범은 각 개인 차원에서는 유익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개인 모두가 그것을 준수하는 상황에서는 결국 집단 차원에서 모두에게 끔찍한 것이 되고 말 수도 있다. (...) 그것은 새들이 만일 흰색 절벽과 대조되는 파란색으로 진화하면 모두가 훨씬 더 쉽게 포식자에게 먹힐 것임에도 불구하고, 새들 대부분이 처음에 파란색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새들까지 전부 파란색으로 진화하는 사태와 같다. (박카스 曰 : 집단에 비효율적이거나 해로운 것조차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집단 내에서 굳어질 수 있다.)


사람들의 네트워크에서는 모종의 규범 체계가 기능 장애를 일으킴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결국 안정적으로 확립될 개연성이 상당히 크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규범이 안정적인(즉, 변화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각 개인이 다른 사람들 모두가 수용하는 규범의 덫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수파 정치철학자들이 전적으로 옳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보수파 철학자들은 한 사회에서 과거로부터 누적된 제도를 경험의 지혜를 담아내는 것이라고 여기며 숭상한다. 그러나 제도는 기능 장애가 아주 심한 규범이 굳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편인 이성의 지배가 옳다는 것은 아니다. 동기가 앞서는 추론은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박카스 曰 : 인간은 자신의 욕심(욕망, 충동, 이익 추구)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행동하거나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합리적 혹은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성을 동원한다.)


조직 내에서 규범을 전략적으로 사용하기


인터넷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네트워크의 회원 자격은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라 의도적인 선택으로 결정된다. 의견이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리기를 좋아하기 마련인데다가 개인의 선택으로 형성되는 인터넷상의 네트워크 집단은 순식간에 온라인 “반향실(echo chamber)”로 진화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네트워크 안에서 누가 말하면 다른 누가 맞장구치는 메아리만 듣는다.


예전에는 사람들의 규범이 크게 달라지는 사태가 서로 장소가 다른 정치체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제는 인터넷의 디지털 연결성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규범이 크게 달라지는 사태가 정치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정치체들 안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더 심하게 극과 극으로 갈리고 있다. (박카스 曰 : 인터넷과 유튜브 알고리즘은 사람들이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나 콘텐츠만 접하게 만들고, 같은 나라 안에서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에만 몰입하게 되면서, 정치적 갈등과 분열이 예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지도자는 모순되는 행동으로 신념 체계를 망가뜨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의 행동을 전략적으로 조탁(彫琢)함으로써 신념 체계를 강화할 수도 있다. (박카스 曰 : 지도자는 말과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더 굳게 만들 수도 있다.)


권력을 권위로 전환하는 것은 대단위 집단들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호혜성 구축에 필수적이다. (박카스 曰 : 많은 사람들이 협력하는 사회를 만들려면, 지도자는 힘으로 억누르기보다 존경받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지도자들은 모두 자기 집단의 신념 체계에 잘 들어맞는 이야기를 새로 보태고 정교하게 다듬는다. 그러나 위대한 지도자는 신념 체계를 통째로 만들어낸다.


소프트웨어식으로 장착되는 섬세한 의무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지, 경제적 인간도 이타적 성인도 아니다. 우리는 존중과 소속을 갈망하며, 이것이 우리의 윤리적 가치를 떠받친다. 전 세계에 걸쳐 그러한 윤리적 가치로 사람들은 여섯 가지를 공통으로 보유한다. 그중 어떤 가치도 이성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배려”라는 가치와 “자유”라는 가치는 진화 과정에서 원초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의리”라는 가치와 “존엄”이라는 가치는 집단을 뒷받침하는 규범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집단 구성원들은 의리와 존엄을 규범으로 준수하고 그 결과로 소속이라는 보상을 얻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치로 내면화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정”이라는 가치와 “위계”라는 가치가 규범으로 진화한 것은 집단 내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였을 것이고, 구성원들은 이 규범들은 준수함으로써 존중이라는 보상을 얻었을 것이다.


가치가 중요한 이유는, 가치가 요구하는 행동(즉, 우리의 의무)이 욕망을 제압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유혹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들은 저마다 우리의 공통 가치에서 윤리를 도려내고 이성을 앞세우며 단 하나의 가치에 특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모든 가치를 깔아뭉갠다. 그로 인해서 어떤 이데올로기든 간에 그것들은 어쩔 수 없이 우리 가치의 일부와 충돌하고, 따라서 그 가치들이 의존하는 심리적 토대와도 충돌한다.


어떤 이데올로기든 간에 자신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추구하다가 소속감을 해치더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목표를 추구하다가 일부 사람들이 굴욕을 당하더라도, “그게 대수인가?” 이데올로기들은 모두 “부수적인 민간인 피해”나 “불량품 파손”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들은 이성이 최고라는 데에는 서로 동의하지만, 그것이 어떤 이성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이로 인해서 이데올로기가 밟아갈 길은 해결 불가능한 사회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들은 그것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로 우리를 진전시키기보다는 역겹고, 잔인하고, 단명한 삶으로 후퇴시킬 공산이 더 크다. (박카스 曰 : 이데올로기는 위에서 말하는 6가지의 윤리적 가치(배려, 자유, 의리, 존엄, 공정, 위계)중에서 하나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다른 가치들을 무시하게 되면서 더 분열되고 고통스러운 사회로 만들 수 있다.)


이 책은 다른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 위에 구축되고, 실용적 사고로 갈고 다듬어지며, 사회 자체에 의해서 재생산되는 규범을 충족하는 윤리적 자본주의이다.


나는 이러한 통찰들을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세 가지 주된 유형의 집단인 가족, 기업, 사회에 적용할 것이다. 이러한 집단들의 지도자가 어떻게 호혜적 의무를 구축하여 공통 가치에 해롭지 않고 유익하게 작용하는 자본주의를 새롭게 조직할 수 있는지를 제시할 것이다.


새로운 의무가 하나 생겨야만 새로운 권리 하나의 생사를 성사시키는 행동의 변화가 일어난다. 새로운 권리가 생겨도 어떤 식으로든 그에 대응하는 의무가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권리이다.


권리는 의무를 내포하지만, 의무는 반드시 권리를 내포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의무는 그들의 법적인 권리를 훨씬 넘어선다. (...) 우리가 물에 빠진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나서는 것은 그 아이의 고통 때문이지 권리 때문이 아니다.


권리가 강조됨에 따라서 법률가들이 특권을 누렸다. 법률가들은 대개 법이나 조약 같은 모종의 성문화된 규정에서 출발해서 그것에 어떤 권리가 합의될 수 있는지를 도출한다.


이처럼 전문 법률가들이 기존의 법률에 함의되는 새 권리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말미암아 이들이 “발견하는” 것과 대다수 사람의 윤리적 상식이 야금야금 괴리되는 사태가 여러 사회에서 일어났다.


최근 영국에서 일어난 사소한 예를 보자면, 법원이 이제는 학교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 그 말이 새로 발견된 동성 부부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사안에서 판사는 소수의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고자 새로운 권리를 만들어냈지만, 그 권리는 다른 수백만 가정의 어린이 양육에 보탬이 되는 근본적인 이야기들을 파괴해 버렸다.


이로움에 비해서 해로움이 이처럼 광범위하다는 점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요구는 실용주의를 누르고 이데올로기가 승리했음을 말해준다. 이기적인 권리 주장은 상호 존중을 좀 먹는다. (박카스 曰 : 실용적 판단보다 이데올로기가 우선된 결과이자, 균형 잡힌 윤리적 가치관이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예시를 들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의무를 인정할수록 우리는 번영을 이룩할 역량이 향상된 사회를 건설한다. 그 의무를 수수방관할수록 그 반대의 결과를 빚는다. 그저 보기만 하면서 내버려두는 행동이 되풀이되면서 자본부의 사회는 병들었다. 이로 인해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징후가 사회적 신뢰의 추락이다.


번영의 약속을 이루려면 서로를 존중하는 우리의 의식이 새롭게 구축되어야 한다. 실용주의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이 과정을 이끌어가려면 상황의 맥락을 눈여겨보고 증거를 중시하는 사고를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이다.




2장 윤리의 토대 : 이기적 유전자에서 윤리적 집단으로 요약


인간은 단순히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 소속과 존중을 갈망하는 사회적 존재이며, 이런 본성 덕분에 집단 속에서 협력하며 살아남았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지속 가능하려면 번영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윤리는 이념이나 원칙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최선의 길을 찾는 실용적 사고에서 나오며, 협력과 존중을 바탕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는 권리만 강조하고 이에 수반되는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신뢰와 존중이 약화되었다. 법률가들이 새로운 권리를 계속 만들어내는 사이, 공동체적 상식과의 괴리도 커지고 있다.


이제 자본주의는 권리 중심에서 벗어나 의무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며, 이때만이 공동체적 신뢰와 존중을 회복하고 윤리적 자본주의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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