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구성하는 사람들보다 국가가 더 윤리적일 수는 없다.
국가의 윤리적 한계는 그 사회의 윤리적 한계에 따라서 정해진다. 지금 국가의 윤리적 목적 결여는 사회 전반에 걸친 윤리적 목적의 쇠락을 반영한다. 우리 사회의 분단이 계속 심해지면서 분단의 저편에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사회의 관대한 태도도 계속 약해졌다. (박카스 曰 : 국가는 국민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이기적이고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다면 국가도 윤리적일 수 없다.)
윤리적 국가의 부상
윤리적 국가(ethical state)의 전성기는 전후 첫 20년이었다. 국가는 윤리적 목적이 충만한 웅장한 시대를 맞이하여 전에 없던 호혜적 의무를 줄줄이 만들어냈다. 이례적으로 아주 넓은 범위에 걸쳐서 시민들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부담하는 새로운 의무가 창출되었고, 국가의 관리하에 두어졌다. 이것을 산뜻하게 담아내는 이야기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리고 “뉴딜”이었다.
사회민주주의 국가는 갈수록 공리주의와 롤스주의 전위대들에게 장악당했고, 윤리적 국가는 가부장적 국가로 변해갔다. 새 전위대들이 다음 사실만 인식했다면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공유 정체성을 계속해서 갱신해가지 않으면 그 이례적인 유산은 소모되는 자산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이를 깨닫기는커녕 정반대로 행동했다.
(박카스 曰 : 이 책에서 ‘전위대’라는 단어는 이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신들이 진보적이고 도덕적으로 앞서 있다고 믿는 엘리트 집단을 비판적으로 지칭할 때 사용된다.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엘리트 집단, 정치·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력, ‘진보’를 독점하려는 계몽주의적 태도를 나타내며, 이들의 자기도취적 도덕주의가 사회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콜리어의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다.)
윤리적 국가의 쇠락 : 사회민주주의 사회는 어떻게 해체되었는가?
사회민주주의 붕괴는 이중의 악재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호혜적 의무가 야금야금 무너지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구조의 변화로 타격을 받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니 호혜적 의무의 필요성은 오히려 더 절실해진 것이다.
학력도 훌륭하고 숙련 기능도 뛰어난 이 새로운 계급은 우파 인사들뿐 아니라 좌파 인사들도 포함한다. 우파 인사들은 개인의 재능에 따라서 이득을 누릴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 지상주의 이데올로기를 신봉했고, 좌파 인사들은 공리주의 이데올로기나 롤스주의적 권리를 신봉했다.
후자인 좌파 상류층 집단은 그들 자신의 국민 정체성을 벗어던졌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도록 권장했다. 또한 피해자로 간주될 만한 특징을 갖춘 사람들에게 피해자라는 특징을 그들의 으뜸 정체성으로 삼도록 고무했다. (박카스 曰 : 현대의 좌우 엘리트 계층은 각자의 이념을 따르며 공동체의식과 정체성을 약화시켰고, 특히 좌파 엘리트들은 국민 정체성을 해체하고 피해자 의식을 중심에 두는 태도로 사회적 분열을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공유 정체성의 상실이 초래하는 악영향들
이렇게 공유 정체성이 해체되면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에 좋지 않은 파급 효과를 초래한다. 사람들의 정체성이 고숙련 기능과 국민 정체성으로 양극화됨에 따라서 상류층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정말, 한편으로는 국민 정체성을 내버리고 자신의 일자리를 중시하는 평균 소득 이상의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 정체성을 고수한 사회 하위층 사람들로 양극화되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별로 없다. 트럼프와 브렉시트, 르펜이 득세한 이후로 이 두 집단이 그 양극화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음에도 의심의 여지가 별로 없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할 수 있다고 확신할 때에 그들을 신뢰한다.
신뢰의 추락이 사회민주주의가 와해되는 과정의 마지막은 아니다. 신뢰가 추락하면 그다음 단계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할 능력이 영향을 받는다. 복잡성이 증폭된 사회에서는 수많은 상호 작용이 신뢰에 의존한다. 따라서 신뢰가 무너지면, 협력을 엮어내는 실오라기들이 하나둘씩 끊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왜 광범위한 국민 정체성을 경계하는가?
개인의 정체성에서 국가를 으뜸으로 여기는 것에 대한 경계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국가주의(nationalism, 또는 국민주의)는 정말 끔찍한 사태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모든 정체성은 자신으로부터 배제할 특징을 은연중에 정의한다. 그러나 배제할 특징이 묵시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명시적인 데다가 적대적일 때에는 그러한 배제 관념이 독소로 변한다. 즉, “우리”가 “그들이 아님”으로 정의되고, “그들”은 증오의 대상이 되며, 우리는 그들이 고통받기를 바란다. 그러한 정체성은 적대를 전제한다.
상류층 고학력자들은 국민 정체성을 경멸하면서 윤리적으로 우월한 고지를 점령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배려한다. 이것을 모르는 당신들이 개탄스럽다.” 그러나 이렇게 윤리적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 정말 정당할까? 가령 한 세대가 더 흐른 뒤에 “세계 시민”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충분히 자리를 잡아서 공공정책에 완전히 반영된다고 상상해보라. 그에 따라서 국민 정체성에 바탕을 둔 조세정책이 다른 내용으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상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미래가 실현된다면, 앞에서 본 “세계 시민”에 대한 세 가지 해석 중에서 어느 것이 주를 이룰 공산이 가장 클 것 같은가? 나는 첫 번째와 세 번째 사이의 절충이 될 것이라고 본다. 즉, 세계 빈곤층에 베푸는 크기는 좀 더 늘어나겠지만, 그 증가분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국내 빈곤층에 베푸는 크기가 대폭 줄어들 것이다. (박카스 曰 : 세계 시민을 자처하는 상류층의 윤리적 우월감은, 결국 자국 내 약자를 희생시키는 위선일 수 있다.)
수수께끼
국민주의자들은 국민 정체성 관념을 지적 재산권에 버금갈 정도로 포획했다. 그들은 실로 국민 정체성의 유구한 전통을 자신들이 이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전통적인 국민주의 형태와는 달리, 새로운 국민주의자들은 민족이나 종교와 같은 기준에 따라서 국민 정체성을 정의하려고 한다. 국민주의의 이러한 변종은 비교적 최근에 출현한 것이고 파시즘의 후계이다. 국민 정체성을 이처럼 새롭게 정의하면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수백만 시민들을 배제해 버린다. 새로운 국민주의자들은 사회를 “우리”와 “그들”로 분리하려는 의도를 꽤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의 부상은 격렬하게 사회를 나눠놓는다. 마린 르펜은 프랑스를 하나로 묶지 못했고, 오히려 2대 1로 분열시켰다(3분의 2가 그녀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사회를 반반으로 양극화했다. 따라서 공유 정체성의 손실로부터 활기를 얻는 그러한 국민주의로 공유 정체성을 되살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것은 앞으로 기대할 공유 정체성의 전망마저 파괴할 것이다. 따라서 그 같은 국민주의는 신뢰와 그것이 촉진하는 협력을, 그리고 상호 존중과 그것이 촉진하는 아량을 갉아먹을 것이다. (박카스 曰 : 콜리어가 말하는 국민주의자는 애국적인 시민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기준으로 ‘누가 진짜 국민인가’를 정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배제하려는 정치 세력을 말한다. 그 결과 사회는 갈라지고, 공동체의 신뢰와 협력, 포용성이 무너진다)
국민주의자들과는 다른 집단으로, 고학력 상류층의 “세계 시민들”은 그들의 국민 정체성을 내버리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우월하다는 신호 보내기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그러한 이기적인 행동이 윤리적으로 고상한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새로 부상한 두 시민 집단인 이들 국민주의자들과 “세계 시민들”에 대해서 피할 수 없는 극명한 결론은 그토록 막대한 비용을 들여 건설된 공유 정체성의 기반을 그들 모두가 갉아먹을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박카스 曰 : 콜리어가 말하는 “세계 시민들”이란 주로 고학력, 상류층 사람들로 국가적 소속감이나 애국심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글로벌 가치를 더 중시하고 자신들의 글로벌 감각을 윤리적으로 우월한 것처럼 여긴다고 지적한다. 이 두 집단 모두, 국민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 정신(공유 정체성)을 해치고 있다. 국민주의자는 배제로, 세계 시민은 무관심으로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진짜 필요한 건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건강한 정체성과 연대다.)
소속과 장소, 그리고 애국주의
모든 사람이 번영을 누리도록 사회가 기능하려면 공유 정체성이 탄탄할 필요가 있다. (박카스 曰 : 폴 콜리어가 말하는 공유 정체성이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같은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끼는 감정과 인식이다. 공유 정체성은 한 사회가 신회, 협력, 평등한 기회를 바탕으로 기능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이것이 무너지면 복지, 사회 정의, 경제적 번영도 지속될 수 없다고 본다.)
효과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정체성에 대한 답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명백한 것이다. 그것은 장소에 대한 소속감이다.
사람들은 소속을 갈구하는 근본적인 욕구가 있다. 소속감에서 핵심적인 차원은 너는 누구? 와 너는 어디?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어린 시절에 정해지고, 보통 평생 지속된다.
현대 생활에 동원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국민 정체성의 개념은 사람들을 같은 장소에 대한 소속감으로 묶는 것이다.
애국주의는 국제관계 속의 국가 행동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국민주의와 날카롭게 구분된다. 자신의 나라를 “최우선”으로 친다고 떠벌리는 국민주의자들의 담론은 국제관계를 다른 나라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는 고집 센 나라가 승리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묘사한다. 마크롱 대통령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 애국주의는 상호 이익을 위한 협력의 담론을 고무한다. (박카스 曰 : 국민주의자는 자국 우선주의로 협력보다 갈등을 조장하고 국제 사회를 제로섬 게임으로 본다. 반면 애국주의는 자국의 이익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다른 나라와 협력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
젊은이들이 소속감을 상실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집을 사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인구 중 자기 주택을 소유한 가구의 비율을 보여주는 자가 보유율은 소속감의 가장 깊숙한 핵을 나타내는 실제적인 지표이다. 자가 보유율을 예전 수준으로 회복하려면 지적인 공공정책이 필요하다.
소속감을 공유하는 심리적인 토대는 장소이지만, 이를 목적의식적인 행동으로 보완할 수 있다. (박카스 曰 : 같은 곳에 산다고 ‘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목표를 향해 함께 행동할 때, 진짜 소속감이 생긴다.)
그동안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적대적인 정체성을 가지도록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그러한 정체성들은 사회에 독소로 작용한다. 서로 적대적인 이해관계의 이야기들은 따로따로 보면 모두 옳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들이 자꾸 누적되면 사회를 좀먹는 폐해가 너무 커져서 집단적인 행복을 퇴보시킨다.
정치인들은 무엇보다도 소통관들이다. 다양한 문화와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 안에 공유 정체성을 건설하는 것은 서로가 함께 행복을 누리는 데에 꼭 필요하지만, 힘겨운 일이다. 그 일이 바로 지도자들이 수행해야 할 기본적인 임무이다.
국가는 국민보다 더 윤리적일 수 없으며, 전후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보여준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국가 모델은 호혜적 의무와 공유 정체성을 바탕으로 번영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좌우 엘리트들이 각자의 이념에 빠져 공동체적 유대를 해체했고, 국민 정체성은 약화되었다. 그 결과 신뢰와 협력이 붕괴하고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었다.
오늘날의 국민주의는 배제와 적대를 조장하고, 상류층의 세계시민주의는 공동체에 무관심함으로써 모두가 공유 정체성을 좀먹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은 장소 기반의 소속감과 포용적 애국주의다. 애국주의는 국제관계를 제로섬이 아닌 협력의 장으로 보고, 국내적으로는 사람들이 함께 속한 장소와 공동 목표를 통해 연대감을 형성하게 한다.
따라서 윤리적 국가는 국민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극단을 넘어, 공유 정체성과 상호 존중을 회복하는 정치적 리더십에 의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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