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실용주의
깊은 균열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피륙을 갈가리 찢어놓고 있다. 그러한 균열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불안을 그리고 새로운 분노를, 또한 우리의 정치에는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불안과 동요가 일어나는 양상을 살펴보면, 그것의 사회적 기저에는 지리와 교육과 윤리가 자리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것은 지방에 위치한 지역들이 대도시에 항거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 수준이 비교적 낮은 저학력자들이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은 고학력자들에게 항거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고전을 면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날치기 건달”과 “지대 추구자들”에게 항거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이에 따라서 최근에는 노동 계급이 아니라, 교육 수준이 낮고 어려움을 겪는 지방 사람들이 혁명적인 세력으로 등장했다. (박카스 曰 : “날치기 건달”(투기꾼, 사기꾼, 일부 금융업자, 단기 차익만 노리는 투자자 등)과 “지대 추구자들”(부동산 투기자, 기업 로비스트, 정치적 특혜를 받는 대기업, 독점 사업자 등)은 노력 없이 경제적 이득을 챙기는 불공정한 집단을 상징하며, 오늘날 분노의 대상이 된 계층을 나타낸다.)
지리적인 위치가 불만이 일어나는 새로운 차원으로 등장했다. 장소에 따라서 경제적인 격차가 벌어지는 지리적 불평등은 장기적으로 꾸준히 축소되다가 최근에 급속하게 확대되고 있다.
이 고학력자들의 재산이 급증하고 덕분에 그들을 포함한 나라의 평균적인 부가 커지기는 했어도, 교육 수준이 그들만 못한 사람들은 대도시권에서나 다른 지역에서나 지금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들에게는 “백인 노동 계급”이라는 오명도 따라다닌다. 그들의 쇠락 증후는 의미 있는 일자리를 아시아로 많이 옮겨버렸고, 기술 변화로 다른 반숙련 일자리를 아시아로 많이 옮겨버렸고, 기술 변화로 다른 반숙련 일자리도 많이 없어지는 중이다. 일자리의 상실은 특히 두 연령층, 중장년층과 첫 직장을 구하려는 청년층을 호되게 타격했다.
지금 부모 세대의 과반수가 자식들의 삶이 그들보다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백인 노동 계급 가운데 이러한 비관적 의견은 실로 놀랄 만한 76퍼센트까지 올라간다. 유럽인들은 미국인들보다 훨씬 더 비관적이다.
불안과 분노, 그리고 절망 속에서 사람들의 정치적 소속감은 물론 정부에 대한 신뢰와 심지어 그들 서로에 대한 신뢰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저학력자들은 최근 정치권을 강타한 반항의 핵심에 있었다. 그 결과로,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무찔렀고, 유럽연합(EU) 탈퇴“냐 ”잔류“냐를 결정하는 영국의 국민투표에서는 탈퇴파가 잔류파를 무찔렀다.
프랑스에서는 마린 르펜과 장뤼크 멜랑숑의 반항적 정당들이 40퍼센트를 웃도는 득표율을 거머쥐었다. (그 결과 집권당이었던 사회당의 득표율은 10퍼센트 밑으로 추락했다.) 독일에서는 연립 정부의 집권당인 기독교민주 동맹과 사회민주당의 득표율이 너무 심하게 떨어져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연방 의회에서 명실상부한 제1야당으로 약진했다.
교육의 분단에 지리적 분단도 가세했다. 런던은 압도적으로 EU잔류에 투표했고, 뉴욕은 압도적으로 클린턴에게 투표했다. 파리는 르펜과 멜랑숑에게서 등을 돌렸고, 프랑크푸르트는 AfD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이에 항거하는 대대적인 반대표는 지방에서 나왔다.
이러한 반란의 표출이 연령층과 관련은 있었지만, 늙은이와 젊은이의 단순한 대립 구도는 아니었다. 자신의 숙련 기능이 무가치해져서 바닥으로 내몰린 중장년 노동자뿐만 아니라 황량한 노동 시장에 새로 진입하는 청년층도 극단으로 돌아섰다. 프랑스에서는 청년층이 새로운 유형의 극우파에 유난히 많이 투표했고, 영국과 미국의 청년층은 새로운 유형의 극좌 후보에 유난히 많이 투표했다.
새로운 불안을 맞이하여 구래의 이데올로기들이 신속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 답이란 우리를 다시 케케묵고 난폭한 좌우 대립으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
매혹적인 위력을 갖춘 이데올로기 옹호자들에게 필적하는 다른 부류의 정치인들은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대중 영합주의자(포퓰리스트)들이다. 이런 정치인들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초보적인 분석마저 회피하고, 옳은 소리로 들리는 해법으로 곧장 2분 안에 달려간다. 이들의 전략은 만화경 속처럼 신기한 오락거리를 동원해서 유권자들이 깊이 생각하지 못하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솜씨를 가진 지도자들이 또 하나의 아주 작은 집단에서 나오는데, 미디어계의 유명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해로운 과정들에 대처할 효과적인 해결책은 분명히 있지만, 이데올로기의 윤리적 열정이나 그저 시류를 타고 도약하는 대중 영합주의로는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해결책은 분석과 증거의 바탕 위에 구축되는 것이고, 따라서 실용주의의 차가운 머리가 필요하다. 이 책에서 제안하는 모든 정책은 실용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승리에 이어 점차 부식해버린 사회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공공정책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은 일하려고 하는 동기 유발의 저해를 최대한 줄이면서 과세를 활용하여 소비를 재분배하는 방식을 갈수록 더 섬세하게 개발하는 일이 되었다. (박카스 曰 : 사회민주주의 공공정책의 본질은 사람들이 일 안 하고 복지에만 의존하지 않게 하면서, 세금으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소비 격차를 줄이려는 정책 설계가 중요해졌다.)
시민의 역할은 이제 책임과 권한이 부여된 윤리적 행위자가 아니라 소비자로 축소되었다. 사회 계획자와 그의 천사들, 공리주의 전위대가 가장 현명하니 시민들은 그들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공동체를 지향하는 방식이 사회적 가부장을 따르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박카스 曰 : 시민은 더 이상 책임 있는 주체가 아니라, 엘리트가 정한 결정만 따르는 수동적인 소비자가 되었고, 사회는 평등한 공동체가 아닌 위에서 통제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자
자본주의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잘 작동하려면, 생산성을 달성할 뿐만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도록 자본주의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자본주의는 무찔러야 할 적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대상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번영을 달성해야 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이어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인간관계는 우리의 삶에 근본적이며, 이러한 관계는 의무를 동반한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사람들은 서로에 대하여 호혜적인 책임을 떠안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공동체의 진수이다. 이기심과 호혜적 의무 사이에서, 즉 개인주의와 공동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세 가지 무대이자 경기장에서 펼쳐진다. 바로 국가, 기업, 가족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세 경기장 각각에서 개인은 기세등등해졌지만, 공동체는 후퇴했다. 세 경기장 각각에 대하여 나는 힘의 평형을 되찾는 정책들을 통해서 어떻게 공동체 윤리를 회복하고 나아가 그것을 증진할 수 있을지를 제안한다.
어떤 정책이든 단 하나의 정책으로는 절망을 바꿀 수 없다. 소비에 집착하는 공리주의적 접근법과는 달리, 문제의 본질은 너무 깊은 곳에 파고들어 있기 때문에 복지 급여를 올려서 소비를 늘리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정책을 통한 사회적 개입의 목적은 어려운 상황에 짓눌리는 가족을 지탱하는 것이지, 정책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박카스 曰 : 정부는 가족이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야 하지만, 부모 역할까지 대신하려 해서는 안 된다. 폴 콜리어는 개인과 공동체의 역할을 국가가 지나치게 대신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합니다.)
무역은 비교우위에서 동력을 얻지만, 이민은 절대우위에서 동력을 얻는다. 이민자들이 유입되는 사회나 이민자들이 떠나는 사회 둘 중에서 하나에 이민이 이롭게 작용한다고 전제할 분석적 근거는 없다. 이민에서 발생하는 이득 가운데 애매함 없이 분명한 것은 이민자들 본인의 이득밖에 없다. (박카스 曰 : 무역은 나라 간 비교우위를 기반으로 이익을 얻지만, 이민은 능력 있는 개인들이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것이며, 이민이 어느 쪽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확실히 이득을 보는 것은 이민자 자신뿐이다.)
매니페스토
20세기의 재앙을 빚은 정치 지도자들은 두 유형 중의 하나에 속했다. 그중 하나는 이데올로기를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들이었고(원칙의 사람들), 다른 하나는 대중 영합주의를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었다(카리스마의 남자들, 그들은 물론 대개 남자들이었다.)
이들 이데올로기 옹호자와 대중 영합주의자와는 달리, 20세기에 가장 큰 성과를 이룩한 지도자들은 실용주의자들이었다.
이제는 “좌파에 가담하는” 정체성이 자신의 윤리적 우월감을 느끼는 손쉬운 길이 되었다. “우파에 가담하는” 정체성은 자신이 “현실주의적”이라고 느끼는 손쉬운 길이 되었다. 독자들은 곧 윤리적인 자본주의의 미래를 탐험할 것이다. 힘은 더 들어도 탄탄한 중앙의 길로 여러분을 안내한다.
현대 사회는 지리적·교육적·계급적 불평등의 심화로 인해 불안과 분노가 커지고 있다. 대도시와 지방,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금융·부동산 특권층과 전통 노동자 사이의 균열이 정치적 반란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트럼프 당선, 브렉시트, 프랑스와 독일의 극단 세력 약진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사회민주주의는 원래 재분배를 통해 불평등을 완화했지만, 시민을 책임 있는 주체가 아닌 소비자로 전락시켜 공동체 윤리를 약화시켰다. 자본주의는 무너뜨릴 대상이 아니라 윤리적·실용적으로 관리해야 할 제도이며, 국가·기업·가족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
결국 극좌·극우의 이데올로기나 단순한 포퓰리즘이 아닌, 실용주의에 기반한 중도의 길만이 새로운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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