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지리적 분단 : 번영하는 대도시, 망가진 도시

by 박카스

폴 콜리어 『자본주의의 미래』 : 제3부 포용적 사회의 회복 - 7장 지리적 분단 : 번영하는 대도시, 망가진 도시




런던, 뉴욕, 도쿄, 파리, 밀라노, 구미권 세계 곳곳에서 대도시는 나라의 다른 지역들을 크게 앞지르며 도약하고 있다. 이 격차가 계속 벌어져서 소득이나 일자리 성장, 주택 가격 중에서 그 어느 것으로 측정하더라도 분단의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1980년대부터 대도시는 가파른 성공 가도를 달리는 와중에 다수의 지방 도시들은 급격한 경제 쇠퇴를 겪었다.


당연히 이러한 상황은 점차 새로운 정치적 분단으로 나타났다. 지방에서는 분통을 터트리는 불만이 일었고, 이에 응수하는 대도시의 태도는 자신만만한 경멸이었다.


전에는 대도시와 지방을 묶어주었던 공유 정체성이 소실되면서 공감과 의무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를 반영하는 현상으로 대도시는 트럼프와 브렉시트, 르펜과 이탈리아의 정당 오성운동과 같은 반항적 진영에 압도적으로 반대표를 던진 반면, 망가진 지방 도시들은 그들의 정치 운동에 호응했다.


이 새로운 분단을 주도한 경제적 요인들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맞서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새로운 분단을 주도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이 새로운 분단을 초래하는 요인들의 기저에는 산업 혁명 때부터 시작된 단순한 두 가지 역학이 작용한다.


규모와 전문화의 효과를 얻으려면,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서 군집을 이룰 필요가 있다. 회사가 충분한 규모로 작동하려면 노동자를 많이 끌어모아야 하고, 고객도 많이 확보해야 할 뿐만 아니라 회사가 다른 유사한 회사들과 가까이 위치해야 한다.


도시가 그처럼 연결된 인접성을 갖추려면 지하철, 도로, 고층 건물, 공항, 철도망에 막대한 투자를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소득은 생선성을 따라가기 때문에 군집체가 발달한 지역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더 풍요롭게 살았다.


세계화 혁명과 지방 도시의 몰락


세계의 반대편에서 부상하는 시장경제인 한국이 새롭게 철강 산업을 일구고 있었다. 한국의 철강 산업은 자신의 기업 군집체를 건설하면서 색다른 장점을 누렸는데, 노동력이 훨씬 더 저렴하다는 점이었다.


1980녀에 이르자 한국에서 철강을 생산하는 것이 셰필드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약간 더 이익률이 높았고, 따라서 한국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셰필드 기업들에 앞서는 경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셰필드의 철강 산업은 수축되기 시작했고, 한국의 철강 산업은 팽창하기 시작했다. 셰필드의 기업 군집체가 축소됨에 따라서 상호 의존적인 다수 기업들의 근거리 밀집으로부터 창출되던 이득, 이른바 “집적의 경제”가 감소했다. 따라서 비용이 증가했다. 반면에 한국의 기업 군집체는 팽창하여 비용이 감소했다. 그 결과는 폭발적이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일하던 숙련 노동자들은 실업자가 되었고 숙련직을 얻을 가망이 없었다. 이처럼 체계적인 충격이 유발하는 비극은 영화 「폴 몬티」에 생생하게 기록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 도시들이 회복할까? 우파 이데올로기의 옹호자들은 정부가 간섭하지만 않으면 시장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신념일 뿐이다. 우리가 실제로 적용할 지식을 얻으려면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시장은 기업 군집체의 붕괴에 대응하지만, 붕괴된 것을 대체할 새군집체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 나타나는 시장이 반응은 주거 및 상가 부동산 가격의 폭락이다. 그 때문에 주택 소유자들은 주택 시세가 채무 잔액에 미달하는 덫에 걸려들고, 번창하는 도시로 이동하려고 버둥거리지만 그런 도시의 주택은 훨씬 더 비싸다.


상가 부동산 가격의 폭락이 새로운 활동을 유인하기는 하는데, 그러한 활동들은 나라 경제의 변두리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즉 국지적 권역의 창고라든가, 부동산 비용이 아주 저렴한 조건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저생산성 제조업, 아니면 저렴한 부동산과 저임금, 비정규 노동에 의존하는 콜센터이다.


도시가 그러한 활동들로 채워짐에 따라서 부동산 가격과 임금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내 더 발전할 여지가 없는 막다른 길에 가로막힌다. 이러한 활동들은 숙련도가 낮고, 따라서 그 노동력은 복잡한 전문화에 의한 지속적인 생산성의 상승에 더는 참여하지 못한다.


대도시에 있는 슈퍼스타급 기업들은 계속 테크놀러지의 최전방을 달리고, 따라서 대도시 인구는 소득이 계속 상승하는 혜택을 누린다. 그러나 대도시의 테크놀러지와 소득은 망가진 도시로는 흘러내리지 않는다.


새로운 분단에 대처하기


이데올로기 옹호자들은 갖가지 해법들을 쏟아내지만, 과신에 눈이 먼 막다른 길로 달려갈 뿐이다.


대중 영합주의자들은 가장 손쉬운 해법을 발견한다. 이처럼 증폭되는 격차가 새로 나타난 것이므로 그들은 이 현상이 나타나기 이전으로 시계를 되돌리자고 한다. 그러기 위한 그들의 정책은 시장의 세계화를 거꾸로 되돌리는 보호주의이다.


시계를 과거로 되돌리는 전략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일류 기업의 군집체들을 새로 확립한 한국과 같은 신흥 시장 국가들은 시계를 과걸 되돌리는 데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데에 있다.


세계화 덕분에 그들은 전례가 없을 만큼 빈곤을 줄일 수 있었다. 만일 한국이 계속 철강 산업을 장악한다면, 영국이 보호주의를 얼마나 동원하든 간에 세계 시장에서 압도적이었던 셰필드의 우위를 되살릴 수는 없다.


보호주의는 기껏해야 셰필드에 영국의 국내 철강 시장만 확보해 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셰필드가 예전에 확보했던 높은 생산성을 복구해 줄 만큼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서 영국의 철강 비용이 상승할 것이므로 철강을 사용하는 영국의 모든 산업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런던과 같은 대도시는 석유처럼 고갈되는 자원이 아니어서 유전보다 훨씬 더 좋다. 이 황금알을 낳는 오리가 아무리 거슬리더라도 오리의 숨통을 조이는 것보다 더 나은 전략들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 영국은 브렉시트 전략을 통해서 바로 그 일을 벌일 태세이다.


브렉시트는 영국이 금융 부문이 다른 유럽 도시들로 옮겨가는 변화를 체계적으로 유발할 것이다.


그러지 말고 황금알을 줍는 편이 낫지 않은가? 달리 말해서, 대도시에 과세하여 얻는 재원을 지방 도시들을 되살리는 데에 쓰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러한 제안을 접하면 이데올로기의 옹호자들은 저마다 침이 튈만큼 열변을 토할 것이다. 우파는 높은 세율이 동기 저하를 유발할 것이라며 도도하게 거들먹거릴 것이고, 지방을 놀고먹는 건달들로 가득한 거대한 “복지의 거리(Benefit Street)”로 바꿔놓을 것이라고 궁시렁거릴 것이다. “시체에 발이 묶이는” 꼴이라는 말도 튀어나올 것이다.


반면에 좌파는 런던 금융가의 돈을 뜯어내려고 너무 열광하는 바람에 깜짝 놀란 기업들의 탈출을 본의 아니게 촉발하여 집적의 경제를 와해시킬지도 모른다.


우파가 인지하는 진실은 지방 도시들을 복지의 거리로 바꾸는 것이 목표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행복은 존엄과 목적에서 생기는 것이지, 단지 소비할 여력이 얼마나 되는가에서 생기지 않는다.


보수가 좋지 않은 일자리를 공적인 급여로 보충하는 전략은 노동자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숙련 기능의 습득이 필수적인 일자리의 창출을 대체할 수 없다. 즉 목표는 생산적인 일자리이지, 비생산적인 일자리의 소득에다가 공적 보조금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우파가 포착하는 진실이다.


좌파가 인지하는 진실은 대도시 고소득 전문 인력의 돈을 뜯어먹는 사람들이 거들먹거리며 누리는 풍요는 윤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마땅히 자신의 소득을 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곧 입증할 것이다.


내가 제안하는 전력은 자연스럽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대도시에 대한 과세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 도시의 소생이다. 각 전략은 서로 다른 별개의 분석을 바탕으로 수립된다.


과세와 대도시 : “우리가 번 돈”이라고?


과세는 윤리성과 효율성을 모두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윤리는 그 자체의 내재적 가치 때문에도 중요하지만, 비윤리적인 세금은 저항과 탈세를 부르기 때문에 중요하기도 하다.


어떤 세금이든 과세를 설계할 때에는 아마도 윤리적인 근거가 효율성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조너선 하이트가 발견했듯이 대다수 사람들의 판단에서 공정성은 평등이 아니라, 비례성과 응분(공정한 공과 분별)을 뜻한다. 그러나 비례성과 응분은 계속 무시되었다.


헨리 조지의 커다란 발상


자,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농부였다. 산업이 새 도시에서 시작되고, 사람들은 그 도시로 이동하여 공장에서 일한다. 공장들의 군집체가 커지면서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할 때보다 생산성이 높아진다. 이 생산성 증가분이 임금에 반영된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노동자를 확보하려고 새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공장에서 일하려면 그 근처에서 살아야 하고, 따라서 그들은 도시가 형성되고 있는 지역의 토지 소유주로부터 토지를 임차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함으로써 획득한 이득은 결국, 높아진 임금에서 이 임차료(rent, 경제학 용어로 지대)를 뺀 값이다. 이 임차료가 농업과 산업의 생산성 격차보다 작은 값이기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수록 임차료가 높아진다. 이 과정이 계속 진행되다가 상승하는 임차료가 생산성의 격차를 모두 먹어치우는 점(즉, 임차료 = 생산성 격차)에서 멈춘다. 그 지점에 도달하면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할 유인이 더 생기지 않는다. 경제학의 특수 용어로 말하면, 균형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짜릿한 것은, 우리의 질문에 답해줄 강력한 핵심 진술이 여기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즉, 집적에서 생기는 모든 이득은 토지주들에게 임차료로 귀속된다.


“토지주들은 이 이득을 수취할 자격이 있는가?”


집적에서 발생하는 이득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 작용이 창출한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집단적인 성취이다. 이것은 바로 경제학자들이 공공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지주들은 집적의 이득이 창출되는 과장에서 무슨 역할을 했을까?


그들은 어쩌다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 땅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득을 벌게 되었다. 그들의 활동은 집적의 이득을 창출하는 데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경제학 어휘로 표현하면, 그들의 소득은 “경제적 지대”로 분류된다.


그들은 토지의 법적 소유자로서 부여받은 법적 권리에 근거하여 집적의 이득에 대한 청구권을 가진다. 그러나 이 청구권은 집적의 이득에 대한 그 도시의 모든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청구권과 충돌한다.


이처럼 합당한 기준들이 충돌할 경우, 실용주의는 우리를 도그마의 신전으로 퇴각하지 말고 절충을 하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과세가 수행하는 역할이 바로 절충이다.


안타깝게도


대도시 도심의 토지를 소유한 덕분에 큰 재산을 불린 사람들은 그 이득에 대한 과세에 반대했다. 그들이 취한 방법은 과세를 반박하는 윤리적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폭증하는 그들 재산의 일부를 사용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사버리는 것이다.


영국에서 런던 도심의 부동산을 많이 소유한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영국 상원의 의원 자리에 앉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고, 그는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자신의 핵심 사업이 뉴욕의 토지 거래였던 사람이 지금의 대통령이다.


공공정책으로 대응하기는커녕 우리는 그동안 케케묵은 이데올로기가 주도하는 과세 논쟁에 발이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집적의 이득에 과세하자는 주장의 설득력은 여전히 강하지만, 그러려면 과세를 영리하게 재설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나리오 1 대도시 노동자들의 숙련 기능이 서로 다르고 주거 필요가 서로 다른 경우


숙련 기능과 주거에 대한 필요의 차이로 말미암아 집적에서 발생하는 이득이 이제는 토지주들에게 귀속되지 않고 커다란 주거가 필요하지 않은 고숙련 독신자들에게 귀속되는 경우가 많다.


앤서니 베너블스와 내가 런던이나 뉴욕과 같은 대도시들에서 이 현상이 어떻게 나타날지 시뮬레이션을 해보았을 때, 집적에 따른 모든 이득의 약 절반이 결국 토지주가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중요한 함의는 토지주들에게 아무리 육중하게 과세하더라도 집적에서 생기는 이득의 대부분을 정부가 과세 대상으로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집적의 이득에 과세할 윤리적 논거는 여전히 강함에도 과세하기가 어렵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2 법의 지배가 필요한 대도시


법의 지배가 갖춰지려면 그것을 뒷받침하려고 협력하고 함께 일하는 평범한 시민들의 행동이 필요하다. 만일 시민들 각자가 뒷짐을 지고 남들에게 맡겨버리면(즉 모든 사람이 무임승차를 하면), 법의 지배라는 공공재는 사라진다.


이 두 시나리오 모두에 공통된 특징을 꼽으면, 집적의 이득을 획득하는 영리한 노동자들은 진정 그들이 그것을 수취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자신의 소득이 높은 이유는 자신의 생산성이 높기 때문이라는 점을 근거로 삼는다.


나아가 자신의 생산성이 높은 이유는 자신이 고도로 숙련된 전문성을 육성했거나(시나리오 1), 자신이 이례적으로 영리하기 때문이라고(시나리오 2) 생각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에는 충분한 진실이 담겨 있는 데다가 그들에게는 아주 편리한 생각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대도시의 생산성은 나라 차원에서 마련되는 공공재에 의존한다. 법의 지배도 그러한 공공재이고, 연결성을 구현하기 위한 과거의 사회간접자본 투자도 그러하다. 이러한 공공재의 혜택은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 다 돌아가지만, 대도시의 숙련 노동자들이 훨씬 큰 혜택을 누린다.


더 근본적으로 보면, 집적의 이득은 그 속성상 집단적으로 창출된다, 그것은 수백만 노동자들이 서로 주고받는 상호 작용에서 나온 결과이지, 고임금 노동자들 각자의 개별적인 노력에서 나오는 결과만은 아니다. 숙련도가 대단히 높은 사람들은 그들의 높은 생산성에서 일정 비율을 수취할 자격이 있지만, 전부를 수취할 자격은 없다.


집적의 이득에 대한 과세의 효율성 명분


경제적 지대는 누가 무슨 일을 하도록 유인하는 데에 필요한 수준을 초과하여 그에게 귀속되는 금액이다.


집적의 이득은 경제적 지대이다. 따라서 효율성의 잣대에서 보면 집적의 이득은 이상적인 과세 표적이다.


과세 효율 측면에서 볼 때, 경제적 지대를 찾아내는 것은 최고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과세로 인한 부수적 피해를 유발하지 않고 세수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집적의 이득 중의 대부분은 숙련 수준이 높고 주거 필요가 적은 사람들에게 귀속된다.


사람들은 인맥이 넓은 친지에게 부탁해서 남들을 제치고 일자리에 비집고 들어간다. 더 많은 자격 조건을 갖추어줄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수강료를 낸다. 취업 면담을 수백 건씩 치른다. 아니면, 결혼을 미루거나 출산을 미루어서 주거 필요를 억제한다. 이러한 행동들 각각이 지대 추구의 형태이다.


수익성이 높은 집적의 지대를 포착하려고 경쟁하느라 사람들의 행동이 왜곡된다. 지대 추구는 파이 전체의 크기를 널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중년의 경력자들이 설 달려들고 충돌하느라 그들의 행복이 집단적인 손실을 볼 뿐이다. 지대 추구로 인한 이러한 손실은 막대할 가능성이 크다.


집적의 이득에 과세하면 지대 추구의 압력이 줄어든다. 대도시에서 그런 일자리를 얻는 것이 여전히 시도할 만한 값어치가 있더라도 수익성이 줄어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쏠리는 빈도는 낮아진다.


런던이나 뉴욕의 값비싼 아파트에 계속 거주하기 위해서 출산을 미루는 것은 너무 큰 희생일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의 번창하는 도시들에서 집적의 경제적 지대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크다.


그 이득을 보려고 달려드는 행동은 달려드는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유발할 터이지만, 서로 앞다투어 그러한 행동으로 쏠리는 사회 분위기 자체 역시 사람들의 눈을 가려서 그들의 삶에 초래될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종합 : 집적의 이득에 어떻게 과세할 수 있는가?


물러야 할 질문은 실제로 어떻게 집접의 이득에 과세할 수 있는가이다. 그 이득이 도시의 토지주와 고숙련 도시 노동자들에게 나뉘어 돌아간다는 점을 상기하자. 따라서 이 이득을 과세로 포착하려면 이 두 집단에 높은 세율로 과세하되 서로 다른 세율로 접근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합당한 출발점은 토지와 건물(토지에 부착된 지상의 모든 정착물 재산)의 가치 상승을 과세 대상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토지아 가치와 건물의 가치에 대하여 일정 백분율의 세금을 해마다 부과하는 것이다. 이 과세로 거두는 세수는 국세로 귀속되어야 한다. 이 세수가 호되게 타격을 받은 다른 도시들에 재분배할 자원 조달에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자격 없는 부자”가 아주 많다. 불행하게도 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정치인이다. 우파는 부유층을 보호하고 싶어하는 반면, 좌파는 그들을 거세게 비판한다. 우리는 부유층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회에 엄청나게 유익한 부자들이 있는가 하면, 집단적 노력의 결실을 그저 따먹기만 하는 부자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주들에게 귀속되지 않고 대도시 고숙련 노동자들에게 구속되는 경제적 지대가 많다는 점이다. 이 지대를 과세 대상으로 포착하려면 과세 혁신이 필요하다. 즉, 세율을 지금처럼 단지 소득으로만 차등화할 것이 아니라, 고소득에 대도시라는 위치를 결합하여 차등화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내는 단 하나의 세금인 기본 세율은 계속 전국적으로 적용된다. 다만, 고소득에 적용되는 각각의 세율에는 대도시의 고숙련 집단이 획득하는 집적의 지대를 과세 표적으로 잡는 대도시 가산세가 따라붙는다. 고숙련자 중에서도 그중 최상위 집단에게 돌아가는 집적의 이득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가산세는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누진적으로 높아져야 한다.


이 과세를 현실에 적용하는 일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왜냐하면 세무 당국이 사람들의 거주지와 근무지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 도시의 재생 : “시체에 발이 묶였다”?


대도시에 과세하는 목적은 망가진 도시의 주민들을 위한 복지 급여 재원을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생산적인 노동의 군집체로 복원하는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다.


이 책을 집필하는 기간에 아마존은 자신이 새로운 본부 입지를 선택하려고 미국 도시들이 참여하는 경매를 진행하는 중이다. 이 회사는 망가진 도시 하나를 소생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이득을 자신을 위해서 빨아낼 만큼 충분히 무자비하다.


조정 문제에 대한 공공 부문의 해법들


싱가포르를 일으켜 세운 리콴유는 집적의 경제학과 윤리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정책에는 이렇게 말하는 그의 식견이 반영되었다. “지가 상승은 경제 발전과 공적 자금을 건설한 사회간접자본이 초래할 결과인데, 나는 그로 인한 이득을 민간의 토지주들이 누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결론 :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번영하는 도시와 망가진 도시 사이의 지리적 분단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최근의 일이고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공공정책을 조금씩 바꿔서 될 일은 아니다.


이것을 바꾸려면 사람들의 기대를 새로운 틀로 바꿔놓는 충격을 유발해야 하고, 따라서 커다란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


해결책은 지리적 불평등의 축소를 달성하겠다는 포괄적인 정책 의지를 확고한 목표로 내거는 것이다. 2011년 유로권은 똑같은 딜레마에 봉착했다. 정책 결정자들은 유로화를 방어하는 데에 어떤 정책들이 효과적일지 알지 못한 채 여러 가지 실험들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 실험들을 포괄하는 유럽중앙은행 총재의 분명한 의지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라는 한마디로 확고하게 표명되었다. 이 말은 충격을 유발했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그 자신에게 실패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투기는 가라앉았다. 우리는 대도시와 지방 도시를 겨냥한 정책에서도 그에 버금가는 확고한 의지가 필요하다.




7장 지리적 분단 : 번영하는 대도시, 망가진 도시 요약


1980년대 이후 런던, 뉴욕, 도쿄 등 세계 주요 대도시는 글로벌 경제와 기술 혁신의 중심이 되면서 소득, 일자리, 주택 가격에서 급격히 성장했다. 반면 전통 제조업에 의존하던 셰필드 같은 지방 도시는 세계화와 신흥국의 부상(예: 한국의 철강 산업 확장)으로 몰락하며 실업과 인구 유출을 겪었다. 이로 인해 정치적 분열도 나타나, 대도시는 브렉시트·트럼프 같은 포퓰리즘에 반대했지만, 쇠퇴한 지방 도시들은 이를 지지하는 갈라진 민심을 드러냈다.


보호무역이나 단순 복지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좌우파의 해법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진짜 문제는 ‘집적의 경제’에서 생기는 이득이 토지주와 대도시 고숙련 노동자에게 집중된다는 점이다. 경제학자 헨리 조지가 지적했듯, 집적의 이득은 사회적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공공재인데, 이를 개인이 독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따라서 토지 가치와 고소득 대도시 노동자에게 ‘대도시 가산세’를 부과해 공정성과 효율성을 확보하고, 이 재원을 지방 도시 재생에 투입해야 한다는 논리가 제시된다.


목표는 단순 복지가 아니라 생산적 일자리와 새로운 군집체 형성을 통해 망가진 도시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지대 상승을 사회 전체의 자산으로 환수한 사례처럼, 강력한 정책적 개입과 분명한 의지가 필요하다. 결국 지리적 불평등은 되돌릴 수 있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라는 확고한 결단과 과감한 정책 전환이 있을 때 대도시와 지방 도시 간의 분단을 줄이고 균형 있는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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