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세계가 1945년의 세계만큼 비윤리적인 것은 전혀 아니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다. 1945년 이래 괄목한 만한 성취, 그에 뒤따른 퇴보,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이 장에서 논의할 내용의 골격이다.
윤리적 세계의 구축
가장 시급한 우선 과제는 국제적 안보였다. 소련이 유발하는 공포 분위기에 대응하여 1949년 새로 설립된 클럽이 NATO이다. 그 핵심 원칙은 회원국 간의 호혜적인 안전 보장이었다. 그들이 공유하는 정체성은 공통의 위협에 대응하는 민주주의 사회였다.
1951년에 시작된 이 노력이 유럽 경제 공동체(EEC)로 확대되었다. NATO와 마찬가지로 이 클럽의 핵심 원칙은 호혜적 의무의 수용이었다.
이웃을 빈곤화하는 1930년대 보호주의의 빗장을 풀어가기 위해서 또 하나의 새로운 클럽으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협정(GATT)이 설립되었다.
1930년대에 경험한 대공항에 대응하여 새로운 클럽이 하나 더 설립되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회원국들이 일정 조건에 따라서 출자금을 납입하고, 일련의 규칙과 감독을 수용하기로 약속하며, 그 대가로 위기가 발생할 때에 융자를 받을 권리를 얻는 공적인 은행이었다. 사실상 IMF는 거대한 상호 보험 시스템이었다.
이러한 호혜적 의무로 결성된 클럽들과 병행하여 세계 지도자들은 구조의 도리를 이행하기 위한 새로운 국제기구들도 설립했다.
난민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국제연합 난민기구(UNHCR)가 출범했고, 기근 발생기에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서 국제연합 세계식량계획(WFP)가 출범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조직은 세계은행이었다. 세계은행은 풍요로운 나라와 가난한 나라, 두 집단으로 회원국을 구분했다. 전자의 집단은 부유한 나라들이 상호 규율을 통해서 자금을 내놓도록 했고, 그처럼 하나로 묶어서 조성된 기금으로 후자의 집단에 자금을 조달해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설립되었다가 실패하여 기능이 정지된 국제연맹 대신에 국제연합이 등장했고, 국제연합 내의 안전보장이사회가 세계 질서의 경찰 역할을 맡기로 했다.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 이사국은 호혜성 실현에 적합한 적은 수라는 조건은 충족했지만, 미국과 소련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승화된 이기심에 필요한 신뢰가 구축될 수 없었다.
윤리적 세계의 침식
이들 국제적 클럽은 호혜성을 준거로 활동했고, 그 밑바닥의 규범은 의리와 공정이었다. 그러나 점차 실용주의는 밀려나고 이데올로기가 주도권을 차지했다.
클럽의 회원 수가 늘어난 만큼 호혜적 의무를 집행하던 결속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여 각 국제기구는 효력이 약해지는 길로 가기도 했고, 중심국들이 좌지우지하는 준제국으로 변신하는 길로 가기도 했다.
NATO의 경우, 호혜성은 창설 회원국들 사이에서도 약해졌다. 현재 29개 회원국 가운데 5개국만이 국내총생산(GDP)의 2퍼센트를 국방에 지출하겠다는 클럽의 약속을 이행한다. 그에 대응해서 미국의 이행 의지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효과적인 클럽이었다가 회원국이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비효과적인 국제기구로 변신한 대표적인 사례는 WTO이다.
GATT가 초기 17년 동안 여섯 차례의 다자간 무역 협상을 이룬 것에 반해서, WTO는 23년 동안 단 한 차례의 협상도 결론을 내지 못했다.
EEC가 EU로 확대되고, 또한 IMF가 클럽 회원국들 간의 상호 은행에서 빈국들을 위한 세계적인 기금으로 확대됨에 따라서 두 국제기구는 모두 제국과 비슷한 조직으로 변해버렸다.
이 조직을 통해서 한 나라의 정부가 다른 나라의 정부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일이 생긴다.
IMF와 세계은행의 중심을 이루는 자금 공여국들은 “의무”를 “권력”으로 변질시켰고, 두 국제기구는 이 중심국들에 지배당하는 조직으로 변했다. 자금 공여국은 먼저 특정한 경제정책의 수용을 조건으로 내걸고 지원을 했다. 그러나 그 자체로 충분히 나쁜 이 발상은 순식간에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한 비정부 단체들에 탈취당했다.
윤리적 세계를 다시 구축하기
호혜적 클럽과 구조는 둘 다 작동할 필요가 있다. 호혜적 클럽이 필요한 이유는 가부장적인 세계 정부는 실현 가능성이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껏 그러한 의무 이행의 측면에서 형편없이 일해왔다. 박수갈채를 받고 생색만 내려는 유혹 때문에 실용적인 효과가 늘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한 사례들을 다음의 항목별로 살펴보자.
난민
난민이 쏟아져 나올만큼 극단적인 대규모의 재난이 발발하면 세계적인 구조의 도리도 생긴다. 피난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이웃 사회가 겪을 난관을 다른 나라들이 나 몰라라 하면 그 사회는 불평할 이유가 있다.
이웃 사회는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 자국의 영토로 들어오도록 혀용해야 하지만, 멀리 떨어진 부유한 사회도 할 일이 있다. 인접한 피난처는 이웃의 의무를 이행하고, 부유한 사회는 구조의 도리를 이행하면서 두 사회가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HIV
레트로바이러스에 대항하는 현대적인 의약품 덕분에 HIV 감염자들은 연간 1,000달러 미만의 비용으로 여러 해 동안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과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윤리성을 높이 살만한 일로, 두 사람은 구조의 도리로 이행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HIV 감염병 치료비를 지원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렇다면 WEIRD는 이러한 도리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공리주의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는 보건 경제학자들은 그러한 돈의 지출에 반대했다.
그러니까 이 말은, HIV 감염자들이 전부 죽도록 내버려 두는 쪽이 비용 면에서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머리 없이 가슴만 앞세우는 대중 영합주의자들은 그것에 반대하는 선동에 나섰다. HIV는 대개 성교를 통해서 전염되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사람들에게 여러 동반자와 성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고 설득할 수 있다면, 그와 동시에 전염률은 대폭 떨어질 것이다.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이 수차례 국민 담화 방송을 통해서 바로 이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행동 변화 운동가들은 그것에 반대했다. 반대 이유는 그런 방송이 HIV 감염자들에게 그들의 행동이 빚은 결과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있음을 시사할 수도 있는 탓에 본의 아니게 그들에게 낙인을 찍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례에서도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피해자는 윤리적 행위자일 수 없다는 것이다.
대규모의 절망에서 구조할 의무
풍족한 사회의 역할은 소수의 총명한 젊은이들을 자신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도록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본고장인 사회에 남아 있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모든 구조의 도리가 시작되는 출발점은 구조받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다.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율성을 복원하고 또 높여주는 일이지, 그들에게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결론
머리와 가슴을 결합하면 세계적인 불안의 위협에 대처할 새로운 호혜적인 클럽들을 창출하고, 또한 구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지원책을 마련해 줄 실용적인 지침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전 세대의 세계 지도자들은 훨씬 더 근심스러운 상황을 물려받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성취했다. 나아가 그들은 다음 세대에 훨씬 나아진(물론 완벽하지는 않아도 변화를 일구어낸) 세계를 물려주었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그 유산을 누리는 복에 겨워서 이데올로기와 대중 영합주의에 탐닉하는 사치로 흘렀다. 그로 인해서 호혜적 클럽은 약해졌고 구조의 도리는 오염되었다. 우리는 지금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접근을 돌아간다면, 우리는 윤리적 세계를 회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훌륭한 윤리적 세계를 만들 수 있다.
6장 윤리적 세계 요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는 윤리적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NATO, EEC, GATT, IMF, 세계은행, UNHCR, WFP 등 호혜적 클럽과 구조 중심의 국제기구를 설립했다. 이들은 회원국 간 상호 의무와 지원을 통해 안보, 경제, 난민, 기근 등 글로벌 문제에 대응하고, 의리와 공정을 바탕으로 국제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초기에는 실용적 효과가 강했으나, 회원국 확대와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호혜적 의무가 약화되고, 일부 기구는 중심국의 권력 도구로 변질되었다.
윤리적 세계의 침식은 다양한 사례에서 드러난다. NATO와 WTO 등은 회원국 확대와 실천 부족으로 효율성이 떨어졌고, IMF와 세계은행은 지원을 조건부 권력으로 전환했다. HIV 치료 지원과 난민 구조 사례에서 보듯, 공리주의적·대중 영합적 사고가 구조의 도리를 훼손하고 피해자에게 낙인을 찍는 문제도 발생했다. 즉, 윤리적 세계는 실용적 호혜성과 구조적 책임이 결합해야 유지될 수 있지만, 현재는 그 원칙이 약화되어 있다.
윤리적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적 세계 정부가 아닌, 호혜적 클럽과 구조의 도리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풍족한 사회는 약자를 존중하며 자율성을 높이는 지원을 제공하고, 국제사회는 실용주의적 접근을 통해 실질적 효과를 우선시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보다 더 강력하고 실질적인 윤리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으며, 호혜와 구조의 균형이 국제적 안정과 정의를 실현하는 핵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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