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주의에 가려진 ‘거대함의 저주’
제4장 「공동체와 자치, 그리고 점진적 개혁 – 진보주의에 가려진 ‘거대함의 저주’」에서는 정치와 경제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지면서, 시민들이 정치 과정에서 소외되고 자치적인 참여가 어려워졌다고 본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보수주의나 자본주의 때문만이 아니라, 진보주의 내부에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샌델에 따르면, 진보주의는 평등과 복지를 추구하며 사회 개혁을 이끌어왔지만, 중앙집권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시민의 자율성과 공동체의 자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선의로 추진된 개혁이 정치와 행정의 '거대화'를 촉진시켰고, 이는 시민들이 정치를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 샌델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지역 공동체의 역할을 강화하고,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정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공동체 속에서 시민들이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공공선을 함께 논의하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본다.
또한 그는 급진적 변혁보다는 도덕적 성찰을 바탕으로 한 점진적 개혁을 통해 시민적 덕성과 공동체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장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단순한 제도적 문제로 보지 않고, 시민의 삶과 공동체의 역할을 중심에 둔 정치 철학의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보통선거권과 다수결이라는 규칙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개인이 국가를 형성한다는 이미지를 사람들의 상상력 속에 불어넣었다.” (...) 결국 “‘자유로운 인간’들이 살아갈 정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투표장에 가는 장엄한 모습”은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 전통적 공동체의 장악력을 해체한 바로 그 기술 및 산업의 세력들이 개인의 선택이나 동의 행위의 범위를 넘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권력 구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P.152)
자치에 대한 위협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권력이 거대 기업들로 집중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화주의가 지배했던 100년 중 상당한 시기 동안 미국인 대부분의 삶을 재배했던 전통적 형태의 권위와 공도에가 침식되는 것이었다. 두 가지가 하나로 결합하면서 자치의 성립 조건들을 약화시켰다. (P.153)
듀이는 공동체의 상실을 단순히 우애와 동료애와 같은 공동체적 감정의 상실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자치에 필요한 공동의 정체성 상실이자 공유된 사회적 삶의 상실이기도 했다. (...) “위대한 사회가 위대한 공동체로 전환되지 않는 한 공공성은 계속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P.157)
도시 개혁과 도덕성 제고라는 계획 너머에는 정치경제학과 관련된 한층 더 광범위한 질문들이 놓여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었다. 대기업이 지배하는 경제 아래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P.162)
“어떤 기업의 하인이 된다는 것”은 강력한 힘을 가진 소수의 사람이 흔히 공공선과 충돌할지라도 자기 입맛대로 설정한 정책에서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다”는 뜻이라고 했다. (P.168)
윌슨(우드로 윌슨 제28대 미국 대통령 재임기간 1913~1921)은 “미국이 지역성과 공동체화 자족적 도시를 억제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국가를 스스로 죽이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즉 윌슨은 경제 권력의 탈중앙화가 공동체 보존의 필수 조건이며, 그러한 공동체에서 자치에 필요한 시민적 덕목을 배양한다고 생각했다. (P.170)
20세기 초가 되면 소비자로서의 시민이 가지는 정치적 존재감은 점점 커졌다. 1914년에 월터 리프먼(20세기 미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저널리스트이자 정치 평론가, 1889~1974)은 소비자주의 운동*을 두고 “오늘날 민주주의 정치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진정한 권력은 바로 ‘높은 생활비’에 비명을 지르는 소비자 대중이다. 소비자의 외침은 무기력하게 쪼그라들기는커녕 노동이나 자본이 추구하는 이익보다 더 강력해질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 그는 여성 참정권이 소비자의 힘을 한층 크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예측했다. (P.178)
웨일은 민주주의의 핵심은 시민의 덕목을 함양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만족을 가장 폭넓게” 달성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 그는 당시 경제 성장 형태가 안고 있는 문제는 불평등한 분배라고 바라봤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냥 부가 아니라 공정하게 분배된 부다. 국민소득상의 통계적 증가가 아니라 한층 더 폭넓게 분배되고 한층 더 경제덕인 차원의 만족이다.” (P.182)
존 셔먼(19세기 미국의 정치인이자 경제 개혁가, 1823~1900) 상원의원과 그의 동료들은 거래를 규제할 목적으로 기업 결합을 제한하는 이 법률이야말로 “자유를 부패하지 않도록 지키고 정치적 삶을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자유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 즉 민주주의 정부를 위한 소중한 주춧돌”이라 생각했다. 셔먼은 트러스트(독점)가 인위적 가격 상승으로 소비자를 기만할 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권력으로 민주 정부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P.193)
1899년에 미시간의 주지사 헤이즌 핑그리(미국의 정치인이자 사업가, 1840~1901)는 트러스트 문제를 다루는 전국 회의에서 연설하면서 (...)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사업가와 숙련된 장인 및 기계공”이야말로 늘 우리 공화국의 힘이었는데 트러스트 때문에 기업의 소유와 관리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면서 과거에 독립성에 유지했던 기업가와 상인이 대기업의 직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P.194)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소비자 복지와 경제적 효율성이 동일한 것이었다. 즉 소비자 복지가 커진다는 의미는 효율성 향상 덕분에 발생한 이득이 낮은 소비자가격이라는 형태로 “낙수효과”*를 유발하든 또는 단순히 기업이 거두는 이익의 증가로 이어지든 간에, 경제적 생산량의 총액이 극대화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크(로버트 보크, 미국의 법학자, 1927~2012)는 다음과 같이 썼다. “소비자 복지는 (...) 국가의 부를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독점반대는 애초부터 물질적 번영에 내재된 개념이긴 하지만, 번영의 열매가 분배되거나 사용되는 방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은 총생산량뿐만 아니라 분배 효과와 공정성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즉 그들에게는 소비자 복지 증진이 소비자가격의 인하, 제품의 품질과 안전성 향상을 의미했다. 이처럼 소비자 복지에 대해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졌기에 보수주의자들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줄여야 한다고 했고 자유주의자들을 정부의 개입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P.213)
레이건 정부의 보수주의자들은 경제적 효율성과 시장 존중을 내세웠지만, 이들은 소규모 생산자들과 독점반대의 시민성을 옹호했던 진보주의자들인 브랜다이스와 험프리가 한때 옹호했던 정책을 옹호하고 나섰다. 한편 자유주의자들과 소비자 단체들은 소매가격이 낮아졌다는 명목을 내세우면서, 과거에 자유주의자들이 독립생산자의 탈중앙 경제를 파괴한다고 경멸했던 할인 체인점을 옹호하고 나섰다. 이러한 역설이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독점금지법을 처음으로 도입했던 공공철학이 소멸했음을 상기시킨다. (P.217)
* 20세기 초 미국의 소비자주의 운동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소비 시장의 급속한 확대 속에서, 소비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공정한 거래 질서를 확립하려는 사회운동이었다. 이 시기 소비자들은 불량식품, 허위광고, 가격 담합 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소비자 운동이 등장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공정한 상품 거래, 정직한 라벨 표기, 소비자 정보 접근권 등이 강조되었으며, 점차적으로 소비자의 권리를 법과 제도 안에서 보장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이 운동은 훗날 1960년대의 소비자 권리장전(John F. Kennedy 대통령 선언)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 낙수효과는 대기업이 거둔 이익이 중소기업이나 소비자에게 돌아간다는 이론, 이것의 반대 개념은 ‘분수효과’다. 경제성장을 통해 소득 불평등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기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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