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의 승리가 의미하는 진실들
제5장 「자유주의와 케인스혁명: 경제학의 승리가 의미하는 진실들」에서는 20세기 중반 이후 자유주의의 변화와 경제학, 특히 케인스주의가 정치와 민주주의에 끼친 영향을 다룬다. 샌델은 자유주의가 원래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는 정치철학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시장의 자유와 개인의 경제적 자율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변화는 대공황 이후 케인스주의가 부상하면서 더욱 뚜렷해졌는데, 케인스주의는 시장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를 제공함으로써 기존 자유방임주의와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샌델은 경제학이 이렇게 정치의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공공의 윤리적 논의와 민주적 가치들이 주변으로 밀려났다고 본다. 즉, 경제학의 논리와 효율성 중심의 사고가 정책결정의 기준이 되면서, 정치가 단순히 기술적 문제 해결의 영역으로 축소되었고, 시민들의 적극적 참여와 공공선에 대한 논의는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학이 승리한 이면에는 민주주의의 약화라는 대가가 있었으며, 우리가 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시장 논리에만 의존할 경우, 민주주의의 본래 가치와 기능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 장은 결국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경제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더불어 정치적 윤리와 시민 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1930년대 후반은 경제 논쟁의 주제가 자치에서 소비자 복지로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점에 국가의 경제 정책도 비슷한 변화를 거쳤다. 뉴딜정책 말기에서 시작해 1960년대 초에 절정에 다다랐던 성장 및 분배 정의의 정치경제학이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을 대체했던 시점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P.222)
뉴딜정책*이 시작되면서 진보주의 시대에 마련됐던 대안들을 반영하기 위한 정치적 논쟁이 계속됐다. 대공황의 와중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이때 개혁을 바라보는 두 개의 전통은 경제 회복으로 나아갈 서로 다른 접근법을 제시했다. 두 개의 개혁자 집단 중 하나는 “새로운 자유” 및 브랜다이스 철학의 계승자들이었다. 이들은 독점금지 및 경쟁 회복을 추구하는 다른 여러 조치를 통해 탈중앙의 경제를 꾀했다.
신국가주의에 뿌리를 둔 다른 집단은 국가적 차원의 경제 계획을 통해 경제 합리화를 꾀했다. 이들은 권력 집중이 현대 경제의 피할 수 없는 특징이므로, 산업 시스템의 체계적 계획과 합리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바라봤다. (P.222)
경기 회복은 구조 개혁이 아니라 막대한 규모의 정부 지출 덕분에 가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정부 지출의 기회를 제공했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그 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케인스주의 재정 정책은 전쟁을 통해 성공이 보장된 경제 정책임을 증명하기도 전에 이미 정치적 차원의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P.223)
1935년에 루스벨트는 부의 집중 및 권력의 집중을 공격하기 위한 시도로 의회에 서한을 보냈다. 서한에서 그는 부자들의 상속세, 증여세, 소득세 인상과 기업 규모에 따른 법인세의 누진 과세를 요구했다. 그의 제안은 휴이 롱 상원의원이 시작했던 “재산 나누기”운동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점점 커지던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의미도 일정 부분 담고 있어 분배 정의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P.229)
정치적 평등은 “경제적 불평등 때문에 빛을” 잃어버렸다. 그러면서 그(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소수로 구성된 집단이 다른 사람들이 일군 번영의 열매와 다른 사람들의 노동, 즉 다른 사람들의 삶을 온전하게 통제하는 권한을 거머쥐었다.” 뉴딜정책의 임무는 경제 권력의 전제주의로부터 미국의 민주주의를 구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 1936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두 번째 임기 첫해에 심각한 경기 침체가 또다시 시작됐다. (P.231)
탈중앙주의자*들은 1930년대 후반의 정책 투쟁에서 허울뿐인 승자였다. 진정하고도 지속적인 승리는 그들과 다른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 즉 구조적 개혁을 포기하고 정부의 재정 지출에 초점을 맞춘 경제 회복 노선을 주장했던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경제를 불황에서 끌어올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재정 정책을 동원해 소비 수요를 자극함으로써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P.233)
루스벨트가 정부 지출을 경제 회복의 도구로 바라보는 식으로 발상을 바꿨다는 것은 곧 초기 뉴딜정책에 영향을 줬던 여러 가지 가정들과 결별했다는 뜻이었다. 지난 5년 동안 뉴딜정책은 경제 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통해 경제 회복을 추구했다. 그런데 불황이 다시 경제를 덮쳤고 동원할 수 있는 실천적 대안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루스벨트는 어쩔 수 없이 케인스주의 재정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는 균형 예산이라는 전통적 재정 청책과 결별했음에도 불구하고, 케인스주의가 요구하는 한층 더 큰 규모의 재정 지출에는 반대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정부 지출이 훨씬 더 큰 규모로 이뤄진 다음에야 비로소 경제가 완전히 회복되고 재정 정책의 부양 효과가 최종적으로 입증됐다. 그동안 케인스주의 경제학의 영향력은 미국 경제학자들과 정책 입안자들 사이에서 점점 더 커졌다. (P.236)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시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정부가 완전 고용을 추구하는 재정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데 깊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모두 이런 확신을 받아들였다. 1944년 대통령 선거운동 때 공화당 후보이던 토머스 듀이는 “우리 공화당원들은 완전 고용이 국가 저책의 첫 번째 목표가 돼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라고 선언하고 정부 지출을 목표 달성의 수단으로 꼽았다. “만약 민간 부분에서 일자리가 부족하다면 정부는 언제든 일자리를 추가로 창출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이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일자리가 마련돼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후 번영을 마련하기 위해 재정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가 이뤄졌고 1946년 고용법*이 탄생했다. 고용법은 연방정부의 정책과 책임, 즉 “고용과 생산과 구매력을 최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연방정부가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정책이자 의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P.237)
자치에 바람직한 경제 환경을 따지는 예전의 질문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재정 정책이 승리하면서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은 성장 및 분배 정의의 정치경제학에 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다. (P.238)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출현은 단지 경제학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정치의 공화주의적 노선이 소멸하고 오늘날의 자유주의가 등장하는 변곡점의 순간이기도 했다. 현대 자유주의에 따르면 정부는 좋은 삶을 규정하는 서로 다른 견해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 개인이 자유롭고 독립적 자아로서 각자의 목적을 선택해 살아갈 수 있도록 존중하고 보장해야 한다. 193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까지 우세하게 진행된 케인스주의 재정 정책은 바로 그러한 자유주의를 반영하는 한편, 자유주의가 미국의 공적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강화했다. (P.239)
전후에 케인스주의가 환영받은 데는 오랜 정치적 논쟁을 가급적 피하고 싶다는 심리도 한몫했다. (...)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경제 기관이나 경제 제도를 관리하지 않고도 경제를 관리하는 ” 방법을 제공했다. 정부가 산업부문에 직접 개입해 관리하지 않고도 재정 정책이나 통화 정책을 통하기만 하면 경제를 얼마든지 성장시킬 수 있었다. “이런 조치들은 과거에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믿었던 것처럼 단순한 미봉책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해결책이었다.” (P.241)
전후에 경제 성장과 완전 교용을 강조하는 태도는 뉴딜 개혁가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합의의 토대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합의할 수 있는 토대도 마련했다. “완전 고용은 모든 사람이 뭉칠 수 있는 깃발이 됐다. 온갖 논쟁과 갈등을 일으켰던 목적이나 정책은 완전 고용이라는 가치보다 중요도가 떨어지게 됐다.” 전후에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에 합의합으로써 재정 정책이 합의된 수단으로 격상될 수 있었다. (P.242)
케인스주의 혁명은 존 F. 케네디(대통령 재임:1961~1963)가 1962년 제안했으며 1964년에 마침내 제정됐던 감세안으로 결실을 맺었다. 케네디는 대통령 임기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균형 예산 신봉자였다. 그러나 재임 첫해에 경제 회복의 속도가 느렸고 또 주변에 케인스주의 자문자들이 있었기에 그는 경제에 자극을 주는 부양책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케네디를 포함해 많은 정부 인사들이 대중의 긴급한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경제를 부양하는 데 정부 지출 규모를 늘려 경제에 대한 재정적 자극에 제공을 선호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균형 예산이라는 방상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던 보수주의자들과 기업인들은 정부의 새로운 재정 정책에 반대했다. 케네디는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를 감안해 정부 지출을 늘리는 정책 대신 감세 정책을 선택했다. 그러자 보수주의자들이 달리 반대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균형 예산보다 세금 감면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감세 정책 덕분에 1960년대가 끝날 때까지 경제 성장이 이어졌고, 케인스주의 재정 관리의 성공적 사례가 됐다. 그런데 케네디의 감세 정책은 경제적 성공을 넘어 현대 재정 정책이 가지는 정치적 매력도 한껏 발산했다. 특히 서로 다투는 정치적 목적들에 대해 중립성을 지킨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P.243)
경제 성장이 모든 사회적·정치적 목적에 기여한다는 발상은 나중에 환경론자들이 등장하면서 무의미해지지만, 어쨌거나 193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이르는 동안 발전한 케인스주의 재정 정책에 모든 당파와 집단이 합의할 수 있었던 토대였다. (P.245)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개인의 선호가 아니라 총수요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소비성향을 높이고자 했다. 이와 관련해 핸슨(앨빈 핸슨, 미국의 대표적인 경제학자로 케인스주의를 미국에 소개하고 확산시킨 인물, 1887–1975)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보장, 사회복지, 지역사회 소비지출과 결합된 누진세 구조 등을 통해 그리고 생산성 향상에 상응하는 임금 상승으로 높은 수준의 고용을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현재의 소비 성향을 한층 더 높일 수 있다. (...)
고용 안정이 보장되면 사람들은 자기 소득 중에서 더 많은 금액을 소비 활동에 사용하게 된다.” 새로운 시민적 덕목을 마련하는데 집중하기보다 소비자 신뢰가 늘어나고 사회의 다양한 계층으로 구매력이 분배될 때 비로소 국가는 “고소비 경제를 향해서” 나아갈 것이다. (P.248)
현대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시민적 덕목을 형성하고자 시민적 덕목을 형성하고자 하는 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미국적 이상의 폐기가 아니라 그 이상을 자유주의 개념에 적합하도록 수정하는 것이다. 공화주의 전통에 따르면 자유는 자치에 의존하며, 자치는 인격의 특정한 성질, 즉 특정한 도덕적·시민적 덕목을 요구한다.
자유주의자들의 관점으로 보자면 시민의 인격 형성을 정부의 역할로 규정하면 강압적 정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 인간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즉 자유주의자들이 형성적 프로젝트를 거부하는 데는 자유에 대한 경제적 개념, 즉 자발주의적 자유관이라 부를 수 있는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 (P.251)
1950년대가 되면 릴리엔탈(데이비드 릴리엔탈, 공공사업을 통해 지역 개발과 경제 회복을 이루려는 뉴딜정책의 대표적 실행자, 1899–1981)은 자유를 바라보는 자기의 희망을 자발주의적 차원에서 재구성했다. 그는 대기업을 옹호하는 글에서 경제 집중이 초래하는 거대함이 자유와 상반된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공포를 반박하면서 (...) “개인이 온전하게 자기 마음대로 보낸 수 있는 시간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대규모 산업이 가진 생산성 덕분에 주당 노동시간이 60시간에서 44시간으로 줄어듦으로써 “사람들이 매주 누릴 수 있는 독립성이 16시간 추가됐다. 이렇게 늘어난 시간 동안에 우리는 자기 소유의 기업을 운영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것보다 한층 더 중요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다. 릴리엔탈이 찬양한 자유는 (...) ”내가 말하는 자유는 본질적으로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라는 뜻이다.“ (P.254~255)
* 뉴딜정책은 1930년대 미국에서 발생한 대공황에 대응하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추진한 경제 회복 정책이다. 대공황으로 인해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급증하는 등 미국 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이에 정부는 이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뉴딜정책은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은행과 금융 제도를 개혁하며, 노동자 보호와 사회복지 제도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테네시강 개발공사(TVA), 사회보장법, 증권거래위원회(SEC) 설립 등이 있으며, 이 정책들은 단기적인 경제 회복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구조 개혁을 목표로 했다. 뉴딜정책은 미국 정부가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시장에 개입한 사례로, 이후 현대 복지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 케인스주의는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제안한 경제 이론으로, 시장이 항상 자동적으로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고 보고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경기 침체 시에는 정부가 지출을 늘리고 세금을 줄여 소비와 투자를 촉진함으로써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 이론은 대공황 이후 많은 국가들의 경제정책에 영향을 주었으며, 뉴딜정책에도 반영되었다.
* 대공황 시절 미국의 탈중앙주의자들은 연방 정부의 권력 강화와 경제 개입에 비판적이었으며, 지방 자치와 개인의 자유를 중시했다. 이들은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처럼 정부가 경제를 조정하고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식에 반대하거나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다. 특히 보수적인 농민, 중소기업인, 자유시장 옹호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입장이 강했으며, 정부의 지나친 개입이 개인의 자율성과 시장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우려했다.
* 1946년 미국의 고용법(Employment Act of 1946)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기 침체와 실업을 방지하기 위해 제정된 법으로, 정부가 완전 고용, 생산성 향상, 물가 안정, 경제 성장을 책임져야 한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 이 법은 연방 정부가 경제를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케인스주의적 발상에 기반하며, 대통령이 매년 경제 보고서를 제출하고, 의회에 경제 자문을 제공할 경제자문위원회(CEA)를 설립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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