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객지 생활을 하려면 편의시설이 좋은곳에 잠자리를 구해야 한다. 당장 생각나는 편의 시설은 마트, 식당, 세탁소 등이 있다. 사람 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삶의 질을 결정하는 큰 요소는 세탁소이다. 정갈하게 다려진 흰 셔츠를 입으면 기분이 좋고, 숨이 살아있는 수트를 입고 나가면 기분이 좋다. 물론 소소한 빨래야 내가 홀로 처리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혼자임에도 깔끔하게 지내려다 보니 세탁소는 매우 중요한 거래처가 되었다.
셔츠를 혼자 다림질 하는 부지런함도 없거니와 돈이 좀 들더라도 나름의 품위유지라고 생각하고 비용을 지불하는 편이다.
동네에 세탁소에 처음 옷을 가져다 줄때 주인 아주머니께서는 무심한듯 귀찮은듯 '네' '네' 만 연신 반복하셨다. 몸이 불편하신 아저씨를 대신해서 세탁소를 운영하시는 아주머니가 바쁘다 보니 그러려니 싶었다. 그래도 난 항상 밝은 얼굴로 인사하고 감사하다는 말은 잊지 않았다. 서로 기분이 좋으면 좋을거란 생각과 더불어서 실제로 난 너무 감사했기 때문이다.
몇개월 지났을까? 약 반년정도 지났는데도 단골이라면 단골인데 너무 무뚝뚝했다. 그래서 원래 그러신가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대가를 바라고 인사를 드리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거진 이틀에 한번 꼴로 보는 사이인데 서로 밝은 얼굴로 인사하면 좀 더 활기차 지지 않을까 라는 기대가 없다면 거짓말 이었다.
어느날 셔츠를 받아오며 나도 모르게 바쁜 마음이 있었던 터라 돈만 주고 나가던 찰나였다. '총각, 여기 거스름돈' . 처음 말했던 금액을 맞춰서 드렸는데 거스름돈이라니 의아했다. 오랜 다림질로 굳은살 투성이신 손으로 천원을 주시는게 아닌가. '아주머니, 제가 돈 딱 맞춰 드렸는데요?' . 말이 끝나길 무섭게 작은 미소와 함께 '천원은 할인이여' . 얼떨결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두번 남기고 가게를 나섰다. 딸랑딸랑, 수백개의 세탁물에 희미해지는 입구 종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들렸다.
몇일동안 아주머니의 웃음이 계속 떠올랐다. 무뚝뚝하시다 못해 내가 뭘 잘못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숙한 표정이셨던 아주머니께서 꼬깃꼬깃 건네신 천원이 너무 낯설었다. 그날 이후로 아주머니는 나보다 먼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는 매번 천원을 깎아주시며 두런두런 말씀도 하신다. 나 또한 밝은 미소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제 세탁소는 작은 이웃이 되었고 내 일상의 따뜻한 공간이 되었다.
우리가 타인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줄 의무는 없다. 특히나 공자는 대가를 바라는 '위하여'라는 호의가 관계를 퇴색시킨다고 이야기 하기도 했다. 남을 맞춰주려는 과도함과, 대가를 바라는 친절을 삶을 오히려 퇴보시킨다는 것에 나도 동의 한다. 그렇지만 친절과 감사의 마음 그 자체가 나쁘진 않다고 생각한다. 회사든, 학교든, 교우관계든 더불어 살아가는 공간이기에 조금씩 내어주는 따뜻한 마음씨는 1+1=2 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좋은 방법이다. 살아가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주고 향기가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
내가 거쳐가는 공간이 여러모로 기쁨의 순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면 나 또한 그보다 즐겁고 보람찬 일은 없을 것이다. 훗날 살아온 세월을 반추할때 진정 기억에 남는것은 시간속에 있는 순간이 아닌, 시간속에 삶은 마주하던 나 스스로일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조금더 깊이 마주할 수 있다. 남은 남임과 동시에 나 또한 누군가의 남일 수 있기때문이다.
노래 가사나 작은 습작속에서나 나올법한 동네 세탁소를 오가며 나는 2018년에 기억된 내 모습을 남겨둘 수 있었다. 세탁소 아주머니의 미소와 더불어 삶의 순간은 풍요로워 졌다. 앞으로도 이 마음, 기분을 기억하며 되도록이면 좋은 순간이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오는 날들이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