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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익 Nov 04. 2015

꾸며진 소통 , 폭압적 권위

편리한 세상의 쓸쓸한 자화상

얼마전 한 인터넷 커뮤티니에서 직장내 카톡이 너무 싫다는 글을 봤다. 친목을 명분으로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부장님의 카톡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라는 내용이었다. 부장님이 글을 올리면 없어지는 숫자에 따라서 대답하는 사람을 세아리고, 차장님은 대답한 사람에 대한 보복업무를 지시한다는 끔찍한 내용이었다. 보고 있는 내내 정말로 이게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맞나 싶었다.


오늘자(11월 4일) 기사에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무력증에 빠졌다는 내용을 본 기억이 있다. 위기는 항상 존재 하는 것이고, 이런 위기를 이겨내 왔던 예전을 생각한다면 괜한 걱정이 아닌가 하는 마음을 가질 수 도있다. 하지만, 이제는 경제질서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고 있다. 그런데도 과거의 승승장구 할 수 밖에 없었던 환경에 살던 습성을 버리지 못한다면 위의 기사가 내 비치는 우려는 무서운 현실이 될 수 있다.


소통을 빙자한 상사의 SNS와 메신저 강제대답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시대의 자화상이다. 각박하고 바쁜 세상일 수록 주체성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개인들의 생산력이 높아지는 법이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내왔던 시대의 충성을 뒤틀린 방식으로 강요하고 있다. '우리때는 더 했어', '우리때 다 이렇게 했던거야' 라는 식으로 정서와 환경의 변화를 무시한 강압을 무언으로 우겨넣고 있다.


물론 열린자세로 선지자적 입장을 통해 현명한 조직문화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 더 많은 줄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권위적이고 폭압적인 문화가 소통이라는 가면을 쓰고 현대인들의 삶을 옥죄고 있는건 사실이다. 주인의식이 없고, 요즘 사람들은 나약하다며 핀잔을 내 비추기 일 쑤인 사람들에게 한마디 묻고 싶다. 주인의식은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명확한 내가 설 수 있는 공간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가 묻고 싶다. 또한 , 나약하다는 근거는 대체 어디서 가져 온 것이며 그 나약함의 기준이 되는 강인함은 또 무엇인지 묻고 싶다.


전통과 구시대적 악습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전통을 오래 지키어 , 향후 미래를 향한 포석으로 삼는 좋은 것이다. 구시대적 악습은 그와 다르다. 구시대적 악습이 전통이라는 범주에 희석되어 조직의 결집력을 와해시키고 있다. 직언을 하거나 , 의견을 개진하면 곧장 그날로 유치한 보복이 행해진다. 참으로 안따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통을 서로 하나됨을 추구하는 격의 없는 민주주의적 명분이다.  이면에 가지고 있는 개인의 권위적 욕심을 포장하기 위한 수사가 아닌 셈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라는 것은 앞으로도 인류를 단단하게 할 교훈이다. 하지만, 제대로 뭉쳤을때 단단한 결속력이 생겨야 할 것이다. 모두가 함게 행복할 수 있고, 동의할 수 있는 참된 뭉치기 야 말로 조직을 경쟁우위에 올려 놓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율과 배려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가식이고 진심이 없는 소통은 오히려 조직을 나락으로 떨어 뜨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본디 인간은 자신을 품어주는 조직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열의를 가지고 있다. 귀속의식은 곧 충성심으로 나타나고 , 충성심은 공동의 발전을 가져다 준다. 곳곳에서 위기가 대두하고, 앞으로 험난한 가시덩쿨이 기다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참된 의미의 소통이야 말로 수사가 아닌 실재 해야 하는 것이다. 더이상 비 정상의 정상화를 묵도 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건 잘못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꾸며진 소통을 없애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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