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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익 Dec 02. 2015

가슴에 남는 사람

친구라는 여백의 이름

아직은 까마득한 미래의 일이지만, 또 그 미래가 얼마나 앞 당겨 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삶을 뒤돌아 봐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을때 미소지을 수 있는 건 무엇 때문일까. 성공한 자녀, 사랑스러운 가족, 풍요로운 재산 그리고 안락한 보금자리. 누구나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적이기에 이 모든것을 다 가지는것은 쉽지 않다. 하늘의 기운이 있다면 , 인간이 쉽사리 이 모든것을 다 가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단 하나만을 선택 할 수 있다면 어떠한 것을 선택해야 할까. 


나는 '친구' 를 선택하고 싶다.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왜 '친구'를 선택했느냐며 의아해 할 수 도있다. 나에게 친구는 특정 사람 그 자체가 아니다. 친구는 내 가슴속의 여백이다. 누구는 더 잘 났고, 누구는 무엇을 했고, 누구는 나에게 무엇을 해줬다. 라는 식의 친구 분별이 아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은 나와 함께 감정을 공유하며 뜨거운 가슴으로 함께 부대끼며 살아왔던 사람이면 충분하다. 계절의 바뀜을 함께 나눌 수 있고, 세월의 흐름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풍요함 이상이다. 친구는 친구 그 이상이기에 , 어머니도 나의 친구였을 수도 있고, 동생도 내 친구 일 수도 있으며, 사랑하는 연인도 나에게 친구 일 수 도있다. 말인 즉슨 , 친구라 함은 사람 그 자체의 인간적 여백을 상징하는 의미 이상의 존재인 셈이다. 


외톨이가 되어 갈 수록,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현실에 마주 할수록 우리는 외로움에 힘겨워 한다. 그 외로움의 근원은 존재의 부재 라기 보다는, 마음속 여백의 부재라고 보는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가슴속 여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유와 사색은 생겨나지 않는다. 마음의 여백은 사람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곧 친구이며 , 친구와의 교감을 통해서 인간 대 인간으로 나눌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을 배운다. 일종의 인류애 또한 이러한 과정속에서 피어 난다. 


연말이 다가 올 수록 이런저런 모임이 많아진다. 어디에서 일하는 누구, 무슨일을 하는 누구, 여기는 무슨 모임, 저기는 무슨모임. 그 많은 모임들은 우리의 여백을 채우기 위한 일종의 노력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막상 모이다보면 도덕적인 개인이 비도덕적 사회를 만들 듯이, 자신의 화려한 깃털만 뽐내기 위한 자리로 변질되는 경우도 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려는 배려는 저만치 사라지고, 서로가 어느새 가면을 쓴 살롱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남들은 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되면 안된다. 


내 가슴의 여백이 삶의 풍요로움을 안겨다 주는 좋은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면, 나 또한 타인에게 따뜻한 여백의 공간을 마음속에 만들어 주도록 해야한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 여백을 만들어 줬다면, 그 여백의 크기만큼 그 사람의 훗날은 풍요로워 질 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기억하고, 기억된다. 가슴에 기억되는 일련의 과정은 '친구'라는 따뜻하고도 멋드러진 관계로 사슬이 채워진다.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한파가 몰아치는 계절이 올때마다 우리는 저마다의 여백을 만들기 위해 더욱더 동분서주한다. 말 한마디 부터 , 작은 태도까지 서로의 가슴에 남는 사람이 되기를 노력한다면 훗날 외로움은 먼 나라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가슴에 남는사람. 그게 바로 친구이며 , 친구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 여백을 함께 만들어간 사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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