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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익 Dec 24. 2015

편견과 배려

편견의 본질은 '나'와 '나 아닌것'이다.

어릴적 도덕시간부터 우리는 '편견을 가지면 안됩니다' 라고 배운다. 편견은 차별을 만들고,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고 배운다. 그리고 편견을 가지고 친구를 대하면 안되고,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면 잘못된 것이라는 답안지가 정답인 시험을 치른다. 어른이 되면 될 수록 세상이 편견 투성이라는 걸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라도 되는 것일까?


편견은 그 근거가 부실하다. 편견은 통상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일들이나, 만났던 사람들을 기본적인 모수로 하는 일종의 경험적 통계이며, 귀납적 추리다. 그런데 그 편견의 근거 자료가 되는 모수가 충분한 통계적 근거가 되는지 부터 의심스럽다. 두어번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과 사귀어본 친구가 '~~~한 환경에서 자란 애는 ~~해'라며 단정을 짓는 모습을 보고 내가 발끈했던 적이 있다. 그건 어디까지나 너의 생각일 뿐이고, 그걸 마치 보편적인 이야기인냥 이야기 하는건 위험하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직접 겪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편견을 만드는 것 보다 더 위험한 것이 있다. 바로 그냥 건너듣고, 떠돌아 다니는 이야기를 듣고 으레 그 편견을 진실로 고착화 하는 습관이다. 미디어가 세상을 이끌어가는 뉴미디어 시대에 이런 근거없는 편견의 생산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정작 상처를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심리가 그렇다. 내가 해당하지 않으면 , 딱히 누군가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 법이다.


편견을 깨는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편견이 왜 생기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것이 어려운 것이다. 우리 교육은 편견이 나쁘다는 것만 가르쳐준다. 편견이 어떠한 토양에서 자라나는 나무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편견은 기본적으로 아(我)와 비아(非我)의 경계를 시작으로 한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나 행동은 편견 이라는 범주에넣지 않는다. 편견은 좋지 않다는걸 알고 있기 때문에 , 본인이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선 나쁘다는걸 인정하려 들지않는다 . 내가 가진 성향은 편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스스로의 습관이나 가치관은 그 '편견이라고 불리우는 항목들' 안에 두지 않는 셈이다.


'나와 나아닌것'을 구분하고 나면, 자연스레 '나 아닌것' 에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내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상처받는걸 일일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쉽게 생각하기도 한다. 편견이라고 불리는 것이 실제로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상처받을 사람을 생각해서 매사에 늘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 그것이 '나'의 문제에 전혀 해당하는 바가 없다면 , 조심성은 옅어진다. 옅어진 조심성의 투명도 만큼 , 상처받을 사람의 상처는 깊어진다.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70억명이 넘는다. 수치조차 가늠이 안된다. 선대에 살았고, 후대에 살아갈 사람들까지 따지면 기하급수적인 사람들이 함께 지구라는 공간에서 살고 있다. 모두가 다르고 ,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습성이 있다. 그것을 하나의 명제로 압축해서 받아들이는건 경솔한 행동이다. 다양성이라는 명목으로 악행이 자행되는 것 또한 잘못된것이지만, 다양성에 대한 조심성이 결여된 것 또한 잘못이다.


인류의 진보와 사회의 발전은 편견을 이기려는 수많은 노력에서 시작되었다. '인간' 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가치 말고는 정해지는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편견은 마땅히 없애야 한다. 편견이 진리인냥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편견을 하나씩 없애고 존중의 사회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편견이 가지는 본질을 파악하는 것에부터 시작해야 한다. 배려와 상생이 이루어지는 살기좋은 공간도 그로부터 시작된다. 윤리시험의 객관식 정답으로 걸러내는 수준을 넘어서, 실제 생활속에서 편견을 걸러내는 능력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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