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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익 Jan 26. 2016

꿀벌의 무지

'문제는 근성이야'

꿀벌의 무지 라는 글귀를 언제인진 몰라도 본 적이 있다. 원래 꿀벌의 날개는 몸을 날아가게 하도록 만들어 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꿀벌은 그것도 모르고 끊임없이 날개짓을 했다. 그 결과 꿀벌은 태생적인 약점을 보란듯이 극복하고 생태계의 파수꾼이 되었다. 꿀벌은 말벌이 자기 보금자리에 침입하면 속수무책이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날카로운 턱으로 꿀벌을 두동강 내는 말벌은 꿀벌의 가장 무서운 적이다. 이런 약한 꿀벌이 말벌을 죽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꿀벌들이 모두 모여 보금자리 안을 계속해서 날개짓을 하며 날아다닌다. 그렇게 분주하게 날아다닌 결과 내부 온도가 올라간다. 꿀벌이 견딜 수 있는 온도는 48도, 말벌이 견딜 수 있는 온도는 46도. 그렇게 말벌을 죽인다. 그리고 자신의 새끼들과 여왕을 지켜낸다. 


난 유독 곤충들 중에서 개미와 꿀벌을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것이 지식의 해박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멋있는 곤충도 아니고 , 쉽게 키울 수 있는 곤충도 아니다. 하지만 유독 왜 꿀벌과 개미의 생태에 흥미를 보이는 것일까. 


학창시절 문제집을 사는 것도 나에게는 꽤 큰 부담이었다. 친구들 중에는 '문제은행' 이라는 아주 고급(?) 정보의 문제집을 구해서 푸는 아이들도 있었다. 원없이 문제집과 참고서를 살 수 있는 아이들이 한창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발달하고 , 서점이 보편화 되어있어서 눈치없이 참고서를 보고 공부를 하고 도서관에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대형서점이 보편화 되지 않고, 서점문화 라는 것 자체가 없었기에 다양한 참고서를 살펴 본다는건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책을 훔칠 수 있는 노릇도 아니었다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선생님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집요하게 따라 다녔다. 교사용 문제집 이라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때 선생님들은 남아도는 것이 참고서였다. 각종 출판사에서 샘플로 나오는 것들이 차고 넘쳤었다. 어차피 쓰지도 않을거 내가 받아서 쓰는것이 어떤가 싶었다. 그런데 쉽사리 선생님들이 주시지 않았다. 그 중 몇몇 선생님이 기억난다. 조용히 나를 교무실로 부르시더니 책을 한 꾸러미 주시던 분이 생각난다. 학기때마다 그렇게 난 선생님 몇분의 도움을 받고 , 대신에 그 과목에는 더욱더 열의를 올릴 수 있었다. 당시 선생님의 호의는 평생 내가 간직하고 있는 감사함의 근원이다(아직 성함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연락이 되질 않는다)


난 언젠가부터 근성을 잃어버렸다. 그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대학 들어오고 나서 형편이 좀 피고 나서부터 나는 나태해 지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서 근성을 서서히 잃어갔던것 같다. 근성은 내가 가장 중요시 하는 덕목이다. 사람을 사귈때 근성있는 사람은 상대방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내가 존경해 마지 않는 성품을 지녔었었다. 근성은 그야말로 우리가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가장 쉬우면서 , 중요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무모하기도 했지만, '안되면 되게 하라' 라는 무대뽀 식의 슬로건에 혹했던 내 어린시절은 근성을 중요시 생각하는 삶의 가치관을 반영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나의 주어진 능력이나 태생이 아니다. 아무리 사회가 어려워 졌다고 해도 , 우선 근성을 가지고 덤비는 기질을 가져야 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오랜기간 사투를 벌이다가 결국 물고기를 잡은 노인이 물고기에게 오히려 존경심을 표하는 장면이 기억이 난다. 이는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근성(소설에서는 물고기의 살고자 하는 근성)에 대한 존경일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노인은 이야기 한다. 자신이 죽어도 된다고.. 그만큼 근성은 우리에게 경이와 초월의 힘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난 언젠가부터 수동적인 사람이 되었고, 알게모르게 합리화에 빠지며 서서히 물들어 갔던것 같다. 타성에 젖어들어가는 순간, 근성은 그저 의미없는 '철부지 행동'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그 과정을 나 또한 반복하고 있었다. 수십년간 나의 좌우명은 '하면 된다' 였다는 걸 나 자신이 놓치고 있었다. 근성을 향한 일말의 의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 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할 따름이다. 


문제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정말로 문제는 '근성' 이다.적어도 나에게는 근성이 문제다. 근성이 있다면, 꿀벌의 무지가 그렇듯 나에게도 용기와 힘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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