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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익 Jan 28. 2016

두개의 세계

운전대를 잡는다는 것, 운전 그 이상의 것.

어릴적에 내가 좋아하는 로보트가 있었다. 그 로보트는 로보트 안에 , 작은 사람 인형이 들어 갈 수 있는 형태의 로보트였다. 인간이 로보트 안에 들어가서 로보트를 조종하는 류의 장난감을 유독 좋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욕심이 많은 사람 이었기 때문에 , 두개의 개체가 존재하는 것을 좋아했던 것일까. 아니면, 보호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조종인의 몸 밖에 안전장치를 두는걸 좋아해서 일까. 이유를 지금도 명확히 찾진 못했지만, 어쨋든 난 그런 로보트를 상당히 좋아했다. 그 뭐랄까..오묘한 감정이 느껴진다고 할 까나.


문득 차를 운전하고 가고 있는데 , 내가 로보트 안에 들어가 있는 조종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를 운전할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내가 운전대를 잡으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차창밖으로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내가 좀전까지 있던 세상이 존재한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으면 그런 세계와는 또다른 층위의 세계속으로 편입되는 느낌이 강렬하게 든다. 일상생활에 존재하던 사회적 약속과 감정표현은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단지 존재하는건 깜빡이와 교통신호와 같은 자동차 세계의 약속들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는다. 


두개의 세계를 경험한다는건 실로 놀라운 경험이다. 저만치 차에서 내리는 사람과 새로이 자동차에 타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차원이 다른 세계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을 받는다. 지나가는 순간들이 어떤 세계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생각은 낯설지만, 제법 익숙하기도 하다. 다만, 운전자에 한해서 이런 새로운 세상의 층위가 펼쳐 진다는 건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차선을 변경하기 위해서 깜빡이를 켜고 들어오는 차에 누가 있는지는 일단 중요하지 않다. 자동차대 자동차의 언어로 서로의 양해를 구하고 , 암묵적인 룰을 통해서 각각의 위치를 가지게 된다. 못생겼든, 이쁘든, 뚱뚱하든, 마르든 상관없이 이미 자동차 안에 들어간 운전자는 자동차 세상에서는 자동차로 서로만의 약속을 이행한다. 마치 로보트끼리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일종의 암호로 이루어 지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싶다. 


저번주에는 택시를 타고 가는데 , 운전자들 끼리 비위가 상하는 일이 있었는지 싸움을 하는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다. 아저씨 한명이 나와서 삿대질을 하고 , 목에 핏대를 세우시면 이야기를 하는데 차안의 여인은 문도 내리지 않고 그냥 있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지만, 흔하디 흔한 도로싸움 이었을것 같다. 저만치 멀어져 가는 그 모습을 보니까. 마치 다른 세계의 존재가 서로 의미없는 분노만을 표출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우스꽝 스러웠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다는 건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 같고, 내가 지금 처한 상황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행동을 해야 하는지 도 달라진다. 어쩌면 나 또한 영화속에서 살고 있는 등장인물 중 한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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