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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자의 썰 Apr 25. 2020

아마존 기행 I, II

2003, 2005, 2019

아마존 기행 I

2003, 2005


마지막 치료를 기다리는 마을을 방문했을 때에도 내 마음속엔 사라지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곳 강가 마을은 흔히 씨족사회로 살아가는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럴 환경인데 왜 보이질 않는 것일까?  이번에도 이렇게 여행이 끝이 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하루 종일 환자들을 돌보고 이제 마지막 환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바로 그 순간 …  깊은 잠에서 화들짝  깨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환자는 제법 큰 키의 19살 정도로 보이는 정신 지체 친구였는데 큰 눈을 껌뻑이며 그 엄마의 손에 이끌려 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 엄마가 무서운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는데, 통역을 통해 전해 들은 말은 ‘밥을 먹지 못한다. 어떻게든 좀 도와달라’ 고 합니다. 저는 잠시 그냥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내 마음의 큰 질문 하나가 대답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아마존 여행 속에 풀리지 않는 질문이 해결되는 찰나였습니다. 그 대답은 내가 마주한 바로  마지막 환자였습니다  난 가만히 가만히 그 순간을 즐거워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이렇게 속 시원한 응답의 기회가 몇 번이나 있을까요?  


2003년  아마존 정글의 작은 마을들을 첫 방문했습니다.  저희 처가 식구 중에 아마존에 계시는 선교사님 부부가 있는데 연락이 왔습니다.  치아가 상해서 아파서 우는 아이들이 많은데 좀 도와달라는 요청에 바로 짐을 꾸렸습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거기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육지길은 있지도 않았고 주로 배를 타고 가야 했습니다.  다행히 파도가 없는 강이라 멀미는 면했지만, 어떤 때는 등받이도 없는 작은 배 위에서 4-5시간씩 몇 번을 가야 도착하는 마을도 있었습니다.  육지에 내려서는 무더운 날씨에 무조건 신어야 한다는 긴 장화는 정말 곤욕이었습니다.  외지인은 장화를 신지 않으면 피부병이 걸린다고 해서, 땀으로 양말이 젖도록 신어야 했던 장화는 정말이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이들을 치료하고 있으면 다 잊어버립니다.  이빨 뽑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한테 시범으로 어리둥절한 꼬마 몇 명 마취하고 룰루랄라 쥐도 새도 모르게 해결하는 것을 보니 몇십 명 되지 않는 동네 사람 모두 줄을 섰습니다. 내가 마치 시골 동네 약장수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고정.. 


어른은 물론이고 정말 신기하게도 아주 어린아이들이라도 마취주사를 하고 치료를 하는 중 조금의 미동도 없습니다.  꼼.. 짝 하지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무 생각이 없기도 하겠고, 웬만한 통증은 당연히 그냥 참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보통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며 그들의 아픔과 싸워야 하는 나의 정신적인 압박도 만만치 않은데, 그런 스트레스에서는 해방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환자들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부락의 총인구가 적게는 20명, 많게는 200면 정도.  그러니 좀 큰 마을에 가서는 조금만 무리를 하면 통증을 호소하는 모든 사람들을 다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마을에서 뽑은 치아가 Gallon 우유통으로 반까지 차 온적도 있었습니다.  내가 뽑아 놓고도 믿어지지 않는 숫자였습니다.  거의 매일 그렇게 이주일이 지나고 제일 마지막 환자라며 제 앞에 앉은 아이는.. 이제 15살 정도 되었을까. 한참 피어나려는 예쁜 여자아이였습니다. 


다른 치아들은 다 좋은데 제일 앞의 치아로만 6개가 충치가 너무 깊어 살릴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내게 제대로 갖추어진 장비가 있었다면 그것들 살라는 것은 큰 일도 아니었는데. 지금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습니다. 통증이 심각한 문제인지라 빼버리는 방법 밖엔.  통역을 통해 그렇게 해도 좋다는 아이의 말을 듣고 제 마음은 무너졌습니다  그 나이의 아이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생각했지만... 난 그것을 집행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고 마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너무나 힘든 치료였습니다.  땀이 너무 많이 나서 제 눈물이 감추어졌습니다. 그렇게 끝이 나나 했는데, 치료가 끝난 후 그 아이의 눈에 고여있는 눈물을 보고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돌아서서 한참을 울습니다.  하나님.. 제발 이 아이를 위로해 달라고 많이 빌었습니다.  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도와달라고 간절히.  그렇게 아픈 기억으로 2003 년 첫 번째 아마존 여행은 끝이 났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바쁘게 지내던 중에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다시 한번 와 줄 수 있겠냐고.  기뻤습니다. 무척이나 반가왔던 이유는 이것이었습니다.  그때 다녀온 후 내 마음속엔 적지 않은 근심이 있었습니다.  내가 느낀 바로는 그들에게 치통은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가는 아이들의 숫자도 많지만, 치통은 누구나 예외가 없이 앓아야 하는 병이었고, 당연히 겪는 그들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정글 마을에서는 주식이 주로 물고기를 죽으로 만들어 먹거나 만주까(고구마) 같이 아주 부드러운 곡물을 먹습니다.  이처럼 단단하지 않은 식감을 가진 음식은 식사 후 치아 사이에 그대로 남고 치아를 금방 상하게 합니다.  칫솔이 보급되지 않은 이 곳에서 썩는 이를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정글 사람들은 누구나 상한 치아로 평생을 살아야 하고, 결국은 다 부서져 치아 없이 살아갑니다.  그들의 오랜 생활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질서를 내가 미꾸라지 한 마리처럼 해짓고 다닌 게 아닐까 우려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오지 않을 나를 원망하진 않았을까 걱정했습니다. 다시 연락을 받으니 내가 그들에게 해를 끼친 것만은 아니었고, 그동안 또 그들의 생활에 변화가 있으리라 기대도 했습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기회가 왔을 때 또 가면 되지.. 라며 위안했습니다. 


2006년 다시 짐을 꾸렸습니다.  이번엔 좀 더 여유가 생겼습니다.  옴 몸에 뿌리던 모기약도 그곳에서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챙기지도 않았고, 또 피부병 안 걸리리라는 확신도 있었기에 장화도 신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꼭 일주일 동안 부락을 돌아다녔습니다.  처음 3일은 지난번 방문했던 마을을 돌았습니다.  생각보단 아픈 환자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지난번에 워낙 무식할 정도로 많이 뽑았고, 또 이제는 어느 정도 계몽도 되었던지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낯이 익은 동네 아이들하고 설렁설렁 놀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3일은 물과 식량을 준비해서 아직 손길이 닫지 않은 깊은 정글 마을로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밤을 새워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에는 정말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 하늘에 박힌 별들이 얼마나 많고 밝은지 이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파란색, 노란색, 주홍색..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은하수에 이릅니다.  별들의 바다.. 진.. 짜 별이 많습니다.  구름처럼 보이는 은하수가 아니라 그 많은 별들이 하나하나 또렷이 보이는데 그 숫자가 무수히 많아 만들어진 은하수..  잠을 자기가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의 연속입니다. 한순간도 놓치기 싫어 갑판에서 별 보며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끝도 없이 넓은 하늘, 또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정글에서 만나는 이름 모를 새들도 날렵한 맵시에 그 화려함이 넘쳐납니다. 애완동물로 키우는 원숭이들은 너무 귀엽고, 한 마을에서 대접받은 거북이 고기는 먹을만합니다. (아마존 거대 물고기 삐라루꾸는 정말 맛없습니다…)  물질문명과는 정반대의 아름다운 밤하늘과 강의 평화로움, 그 모든 것을 덥고 있는 고요함은 또 하나의 최고의 예술작품입니다. 


무서운 위험도 있습니다.  한 부락에서 화장실이 급해 겨우 하나 있는 동네 화장실을 찾아갔는데, 쪼그려 앉은 머리 위로 뭐가 후드득 떨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푸더덕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엄청난 수의 박쥐가 내 머리 위로 한가득 빼곡히 있었습니다.  모두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수백 마리가 좁은 공간 내 머리 위에서 푸더덕 거리는 모습은 어떤 호러무비보다 무서웠고, 일을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도망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물이 불어 편편한 땅을 찾기가 어려워 강 위에 세워진 집에서 진료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강바닥에서 큰 뱀 한 마리가 튀어 올라왔습니다.  쫒고 있던 개구리가 튀어나오자 그 뱀도 따라 올라온 것이었습니다.  제가 서 있는 바로 옆에서.  정말 무섭게 생긴 뱀이었습니다. 완전 얼음이 되어 서 있는데 동네 장정들이 나무막대로 찍어 머리가 잘려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입을 벌리고 있고 송곳니에서 떨어지는 독이 똑똑히 보였습니다.  밤에 배를 타고 갈 때는 빨간 눈이 선명히 보이는 악어들도 강주위로 늘어져 있었습니다.  육식 물고기 피라니아는 강에 가득했습니다. 


그런 무시무시한 상황도 여러 번 있었지만 이상하게 겁은 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그 질문만 머리에 계속 맴돌고 있었습니다.  왜 이번에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걸까?  이곳은 더 깊이 들어와 씨족사회의 흔적이 많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진 않아도 거친 환경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분명 있을 텐데...


그러다 엄마의 손에 끌려온 마지막 환자. 그 정신지체 아들은 자기감정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내는 것 같은 데 나도 그 엄마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치과일을 하며 경험으로 아는 감각으로는 이 친구는 많은 육신의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몸을 마구 흔들어대던 그 친구를 어쩌지 못하고 야단만 치던 엄마를 밖으로 내 보냈습니다.  그러곤 그 친구의 상황을 보니.. 어느 하나 성한 치아가 없었습니다.  진단은 치아 전부를 뽑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시작을 했고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내 손이 닿는 순간 이빨의 깊은 뿌리들은 항복 선언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거짓말처럼 빠르게 모든 발치가 끝이 나고, 갈라놓은 잇몸들을 빈틈없이 다 봉합하고 허리를 폈습니다… 바로 그때 주위에 있던 동네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어리둥절하고 감동이었지만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이건 정말 내가 한 것이 아니다 …


언제 다시 아마존으로 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돌아볼 수 있는 곳은 한두 번씩 다 갔으니 한동안 환자들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며 두 번의 여행을 통해 겪었던 것들을 가감 없이 적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렷이 드러났던 그분의 영광을 조심스럽게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일상의 생황에서도 그때처럼 드라마 같은 일들이 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자세히 자세히 보면 보일 것도 같습니다.  내게 주어진 영역이 이 곳 아마존 작은 마을까지 미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배 위에서 넓은 하늘을 보며 내가 작은 도구로 쓰였던 것 같은 감사함은 끝도 보이지 않는 아마존 강줄기만큼이었습니다. 











아마존 기행 II

2019


13년 만에 다시 아마존 강가 마을을 찾았습니다.  주위 교회에서 그곳으로 다시 단기선교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억지로 따라붙었습니다.  그분들에게 폐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곳이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너무 궁금하기도 했고, 너무나 너무나 고요한 강에서 바라보는 밤하늘이 꼭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많이 무르익은 내 손재주로 이번에는 어떤 일들을 할 수 있을까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혹시나 해서 구글맵으로 그곳을 찾아보니 우리가 본거지로 삼았던 동네, Autazes, 가 위성 이미지로 뚜렷이 나옵니다.  와.. 그동안 인터넷을 통한 정보가 엄청나게 업데이트가 되었고, 내가 배 타고 다녔던 곳이 대충 어디인지도 알 것 같았습니다.  황무지를 개간해 비포장이지만 길도 생겼습니다. 열 시간이 넘게 배를 타고 가서 도착했던 Autazes가 이젠 브라질 Manaus공항에 내려 버스 타고 배 한 번만 타면 3시간이면 도착했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버스와 배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모두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강가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Autazes에 도착하니 보이지 않던 건물들도 많이 생겼고 차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 치과 간판도 보였습니다... 이젠 여기에도 치과가 들어왔구나.  그래도 여긴 제법 큰 동네이고 깊숙한 정글 사람들은 얼마나 이곳을 나올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치료비는 얼마나 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처음 이틀을 Autazes에서 멀지 않은 마을들을 방문을 했습니다, 버스로 배로 한두 시간?  이미 광고가 나갔던지라 예전처럼 환자들이 많을 꺼라 생각을 했지만 정작 날 찾아오는 사람들은 열댓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어른들이 많이 왔었는데, 이미 정식 치료를 받은 흔적이 있고 더 좋은 치료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한 두 개 발치로 끝났습니다.  그러던 중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한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문제가 있다면서 보여주는데 이 아이는 치과 교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교정이라니?  이 마을은 내가 2003년에 어린아이 앞니 6개를 정리하고 눈물 흘린 바로 그 동네인데, 교정이라니?  교정은 상한 치아와는 전혀 상관없이 더 예뻐지기 위해 하는 미용치료가 아닌가?  이미 이곳은 그 정도로 변했단 말인가?  교정기서 삐져나온 철사줄이 아프다며 잘라달라고.  틀리를 착용하고 있는 어른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혹시나 예전의 그 소녀 (이젠 아줌마?) 가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이젠 앞의 치아가 사라진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를 인도했던 선교사님들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주위엔 사람들이 늘 구름처럼 모여들었었는데 이젠 호객행위 (?)를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직감을 했지만 치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환자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하시던 선교사님들이 모습은 나에게는 더 혼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다시 물과 식량을 싣고 먼 강가 정글 마을로 떠났습니다.  하루하고 반나절을 꼬박 달렸습니다.  이렇게 멀리 왔어도 강가에서 악어를 만난다는 것은 이미 옛날 일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치는 배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강가 주위로 설치된 전기선이 하루 종일 우리 배를 따라다녔습니다. 정말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마을에서는 하루에 몇 시간씩이지만  전기가 들어왔고, 아무리 멀리 갔어도 동네엔 학교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정부에서 파견한 정식 교사가 정기적으로 방문을 하고 의사도 들어온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깊숙한 마을에 갔어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예전엔 우리가 그들을 의 사진을 찍었었는데, 이젠 그들이 우리 사진을 찍습니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선교단체들이 줄을 잇다고도 합니다. 각 선교단체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각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구역 표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땅따먹기를 하는 것처럼.  사실 이곳에 오기 위해 브라질 마나우스 공항에 내렸을 때 그 비행기 안의 거의 대부분의 승객들은 아마존에 오기 위한 선교팀들이었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는 그야말로 브라질 현지인들은 손꼽을 정도로 몇 되지 않고 모두 선교단체로 온 미국 대학생들 뿐이었습니다.   


난 혼란스러웠습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지?  정식으로 파견하는 의사가 들어오는 곳에서는 더 이상 의료행위란 불법이 될 수도 있는데.  동행한 선교사님들도 선 듯 추천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많은 고민 끝에 환자들을 보기로 했습니다.  짧고 굵게!  어린아이 환자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계몽의 효과도 있었겠지만 발치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결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로 내가 본 환자들은 어른들이었습니다. 동네마다 5-10명 정도가 나에게 왔는데, 하나 같이 한두 개의 치아들이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상한 치아는 상태가 이미 너무 나빠 아무나 쉬이 손댈 수 없는 컨디션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의 발치는 당연히 더 힘든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과는 달리 어른들이 문제가 더 많았습니다. 생각하면 이런 치아 상태는 지금 필라델피아 아무 동네에서나 볼 수 있는 것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른들 상한 치아 하나 빼는 것이 예전에 4-5개 발치하는 것만큼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신체적 발육이 좋아져 뼈가 튼튼해진 것이 벌써 느껴지고, 잇몸 속으로 부러지면 더 고생을 하는지라 힘은 훨씬 더 들었던 것 같습니다. 매번 잇몸을 다 해집는지라 내 옆에서 지혈을 하는 분이 두 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한 마을에서는 30대 여자분을 보게 되었는데 사랑니부터 시작해서 어금니 세 개를 발치를 했었어야 했습니다. 장비를 제대로 갖춘 곳에서도 쉬운 치료를 아니었습니다.  난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시작을 했는데 발치를 하고 나니 엄청난 크기의 낭종 (Cyst)이 턱 뼛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눈으로 보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질병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도 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가지고 간 도구가 있어 만족할 만한 치료를 끝내고 15번 이상을 봉합한 뒤 항생제를 손에 쥐어주고 그 마을을 떠났습니다.  


매 방문하는 마을마다 비슷한 치료들을 하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이 곳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이젠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무조건 도와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틀릴지도 모른다..  그동안 이 분들의 생활이 급속히 업그레이드가 되는 동안, 우리의 생각은 정체되어만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십 년을 그곳에 거주하셨던 선교사님들의 생각도 예전이랑 변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이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아이들에게 15년과 똑같이 종이로 만든 악보를 들이대며, 똑같은 아이들 찬양을 부르시는 모습은 분명 엇박자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나에게는 위로가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예전 같았으면 불가능했을 것 같은 치료의 연속이었습니다. 당장의 고통에서 시름하는 곳에 한번 던져진 해결책이 아니라, 더 심각한 문제로 발전할 수 있는 상태의 고통들을 돌 볼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그 결과는 책임져 달라고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을 나누고 싶다면 이제는 멀리 보지 말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이었습니다. 구글맵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은 이미 바로 내 옆에 와 있습니다.  지금 바로 이 자리가 세상의 끝이고 한 발만 내 뒤디면 난 어디든지 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배 위에서 다시 본 밤하늘의 별은 여전히 아름다왔습니다.  북두칠성이 수평선 바로 위에 있었는데, 필라 집으로 돌아오니 내 머리 위에 떠 있었습니다, 조금은 어두워져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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