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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자의 썰 Apr 25. 2020

스토브리그

내가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엔 유명한 Phyllis 야구팀이 있다. 이전에 박찬호 선수도  이 팀에서 훌륭하게 활약한 바가 있어  우리에겐 더 친숙한 팀이다. 2008년 World Series 우승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시 상위권 진입을 위한 애잔한 스토브리그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대부분 미국분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스포츠 팀들이 있고, 평생 그 팀의 열열한 팬이 된다.  늘 그 팀의 모자와 티셔츠를 입고 다니고 그 팀의 성적과 선수들 이야기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는 어르신들이 많다. 미국에서 가장 열성적인 응원은 당연히 미식축구이지만 역시나 오래가는 열정은 야구가 제일인 것 같다.

내 오피스를 찾아올 때 언제나 빨간  Phyllis 모자를 쓰고 오셨던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다.  이름이 Howard K.이었다.   그 열열한 필라 야구팬의 정석처럼 언제나 야구 이야기를 하고 좋아하는 2루수 Chase Utley를 찬양했다.  이 할아버지, 말이 많으시고 대화를 좋아하는 건 좋은데, 문제는 말이 너무너무 많으신 것이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마취를 하기까지는 적어도 2분이면 될 일을 10분을 넘긴다.  치료를 하는 중에도, 그리고 치료가 끝난 다음에도 이 할아버지의 야구에 대한 수다 (?)는 끝날 기미가 없다.  


처음엔 이 할아버지가 오시는 날은 나도 Phyllis 게임에 대한 최신 소식을 읽어 놓고, 게임 하잇 라이트도 열심히 보며 확실한 업데이트를 한 다음 야구에 대한 수다를 목이 아프도록 같이 즐겼었다.  물론 나도 너무 재미있었다.  그러는 동안 이 할아버지의 식구들이 하나둘씩 우리 오피스로 오기 시작했는데, 아들 셋, 딸 둘, 그 직계 식구들, 사돈들.. 정말 굵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많은 새 환자분들이 스케줄을 채우기 시작했다.  


Howard 할아버지는 말년에 많이 쇠약해지셨는데 여구에 대한 수다는 여전하셨다. 어느 오후였는데 엄청 바쁜 환자 스케줄을 겨우 겨우 소화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Howard 가 오셔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야구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난 아주 차갑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 Sir, I am running very behind.  Can I just focus your dental issue today?”.  서운해하시는 그분의 표정을 곧바로 읽었지만 난 그 날 알맹이 없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치아에 별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간호사가 부축해 나가시며 날 돌아보며 미소를 보내셨는데 …  그것이 그분의 마지막이었다.  우리 오피스 방문 후 며칠 뒤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간호사가 살짝 귀띔을 해주는데..  몸이 편하지 않지만 내가 보고 싶어서 우겨서 치과를 왔었다고 한다.  


난 한동안 너무 멍청하게 있다가, 내 방에 숨어 들어가서 문 잠그고 잠시 울었던 기억이 있다.  늘 잘하다가 한번 그렇게 실수를 했는데 그것이 바로 마지막이 될 줄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분의 장례식에 꽃을 보냈지만, 그게 무슨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벌써 10여 년 전 이야기이다.  아직도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빨간 Phyllis 모자를 쓰고 다닌다.  그 모자마다 Howard 할아버지가 보인다.  싸가지 없이 말을 한 나도 보인다.  


우리 치과 비즈니스도 스토브리그가 있으면 좋겠다.  한 시즌을 열심히 죽어라 일을 하고, 다음 시즌을 위해서 충분한 휴식도 하고, 공부도 하고, 조급한 마음도 추스르고.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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