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가 나중엔 미술 자체보다도 실험 연구 같은 거에 빠졌거든.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사람들 눈에, 돈 되는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게 보인 거지. 그런데, 아니? 다
빈치는 어떻게 여겨지든 개의치 않은 듯해. 그에 반해 고흐는 몹시 고뇌했던 것 같지만.
비밀? 나는 여전히 비밀이란 말에 약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대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호적에 올려진 정식 이름은 "Leonardo di Ser Piero d'Antonio di Ser Piero di Ser Guido Vinci"라고. 즉 빈치라는 마을의 신사 가문인 Ser Piero 의 아들 레오나르도라고 명기된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15세의 고아 소녀가 세르 피에로 다 빈치 사이에 태어났다는 것, 처음엔 친모 곁에서 자라다가 아마도 다섯 살 무렵 정식 장남으로서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 어려서부터 예술적 재능이 나타나 십 대 무렵부터 공방(미술가의 작업실)의 견습생으로 배움을 시작했다는 것, 이러한 몇 가지 외에 그의 소년 시절은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위대한 인물 다빈치의 예술을 심리학의 관점으로 분석하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1909-1910)
사실, 이 논문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세기적 천재라 불리는 한 예술가의 생애에 본격적으로 투영시켜 보았다는 점에서,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그렇다 하나 결정적으로 중대한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논문이기도 했다. 프로이트가 주장하고자 하는 논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다 빈치의 '어릴 적 독수리와 접촉한 기억'이, 알고 보니 '솔개'를 독수리라 번역한 책을 프로이트가 텍스트로 삼았던 탓에 발생한 오류였다는 것이다.
새 이름 하나가 뭐가 중요하냐 하겠지만, 프로이트가 독수리로 받아들인 덕분에, 프로이트는 이집트의 고대 신화까지 섭렵하여 그 성(性)적 상징성에 연결하며, 다빈치의 인생에서 보이는 어떤 경향성과 그 인과를 분석했다.
그리고, 다 빈치가 동성애라고 단정 지은 것도 어쩌면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른대.
아들과 프로이트의 논문 얘기를 하게 된 까닭은 별 게 아니고, 지난 9월부터 한 달여 실험을 마치고 이제 논문을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아들의 말에, 우선 시작하라고 용기를 주기 위해서였다.
솔개를 독수리로 받아들여서 논증한 것이라면, 독수리와 신화를 연결한것 등, 사실 근본부터 신빙성이 흔들릴 논문인데 말야, 지금껏 여전히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어. 엄마도 모처럼 서점에 가서 이 책을 사왔잖아. 신간이야. ...다 빈치에 대한 흥미를 자신의 전공에 결합한 프로이트의 열정이 그런 실수를 뛰어넘을 정도로 무한한 작용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ㅡ심리학으로 파헤친 걸작의 비밀"이라는 제목의 책 얘기를 이어나갔다.
"이미 훨씬 전부터 나는 독수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질 운명을 타고난 듯하다. 왜냐하면 퍽 어렸을 적, 요람에 누워 있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 내려와 꼬리로 나의 입을 열고 여러 번 내 입술을 친 일이 기억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중시하여 인용한 레오나르도의 유년시절 기억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독수리라고 적혀 있다는 것임.)
레오나르도가 기억해 낸 이것으로부터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 점, 그러므로 허점을 크게 노출한 연구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이 연구 발표가 프로이트에 있어 생애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또 사람들은 이 글이 발표된 이후부터,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연모(恋母) 정서가 강한 예술가로 여긴다든지, 동성애자로 미리 단정 지으며 얘기하곤 했다. 말하자면 모두들 프로이트를 통해 다 빈치를 보려 한 것이다.
그러니까 아들, 연구 결과가 완벽해야한다고만 고집하면 논문을 영영 시작할 수 없을지 몰라. 모자란 점이 있으면 좀 어때, 최선을 다해 써 보는 거지. 부족하면 네가 후속 편을 쓰던지, 다른 연구자가 보완해도 되잖아. 그런 뜻에서, 문제점이 있는 논문이분명한데도 이렇게 오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프로이트의 다 빈치 연구를 말해 주는 거야.
아들에게 해 주는 말이었지만, 사실은 내게도 들려주는 격려였다.
다소 부족함을 느낄지라도 미루지 말고 실행에 옮길 것.
그리고 실행한 만큼 자신을 인정하고 다독일 것.
이 두 가지 중 두 번째는 고흐의 서간집을 읽으며, 내가 고흐에게 날마다 해 주고 싶던 충고이기도 하다.
고흐, 너는 자책이 너무 심해. 네가 다다른 미감(美感), 네 엄청난 작업량... 넌 이미 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어.
사실은 고흐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다다른 예술적 경지, 계속 고양되어갔음을, 그림을 그리면서 매 순간 스스로 못 느꼈다면거짓말이리라. 고흐는 다만 경제적 능력이란 측면에서, 화가로 전업하던 당초 계획했던 것과 달리, 자신의 그림이 전혀 경제적 작용을 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컸을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이 동생과 약속했던 한 사람 화가의 몫을못하고, 화폐로 환산될 가능성을 얻지 못한
작품밖에, 그 작품 말고는 보여줄 수 없게 되어서, 점점 확연해지는 자신의 (경제적) 무능력 앞에 절망했던 것이리라.
절망 앞에서 시련은 언제나 길다.
인간 고흐는 긴 시련을 못 견디고 무너졌지만, 화가 고흐는 봄의 환희 속에 꽃을 피워냈다. 고흐의 불행은, 이 두 개의 자아가 극과 극이 되어, 마음 어딘가에 적당한 화해 지점을 마련하지 못하고 충돌한탓이 컸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아이가 태어난다는 소식,게다가 그 아이에게 자신의 이름 빈센트가 물려진다는 소식에, 기쁨과 축복의 마음을 다해 이 '꽃 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