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 일요일 오전은 일요일다운 느긋함을 좋아한다.
느지막히 눈을 떠서 빛이 가득한 창을 보며
"아아.일요일."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평온함과 만족감을 들이마신다.
이럴 때만은 옛 성현의 "목숨은 때가 있다. 부지런히 마음을 닦아라."ㅡ 같은 가르침도 잠시 소리를 낮추고 피해준다. 살아있는 현대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일요일 오전의 소소한 행복을 위하여서 말이다.
#.
그런 탓으로
"이태원참사"라는 뉴스 해드라인을 거의 정오가 되기 직전에야 읽은 것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이게 무슨 일이지? 평화로운 일상에서 조금도 예상 못한 사고라서 혼란스럽기조차 했다.
이런 걸 두고 밤새 안녕이라 하는 것인가?
솔직히 말하면 다이소에 들렀다가 할로윈 축제철이 다가왔구나 짐작만 했지, 바로 어제 토요일인 29일에 축제행사가 있다는 것도 몰랐던 나다. 이렇게 유행에 뒤떨어진 감각으로 그저 주말의 호젓함이 좋아 푹 자고 일어난 뒤였으니....
#.
오후 늦게 한 두어 명의 지인집에서 다행이었다는 안도의 한 마디가 날아온다. 하나는 딸이 친구들과 갈까말까 하다 말았다는 소식. 또 하나는 그 분 손녀가 이태원역까지만 가고 바로 돌아왔다고. 이유는 친구 때문이었다. 같이 간 친구가 역에서부터 사람들이 너무 많은 데 놀라 자꾸 돌아가자 해서 걸어보지도 못하고 다시 전철을 타고 돌아와야 했다고. 평상시라면 사람구경도 하나의 재미인데 그걸 못 봤냐고 놀릴 일이지만, 결과를 놓고 볼 땐 막상 현장에서 미리 겁을 먹고 소심해진 친구에게 생명의 은인이라고 감사해야 할 판이다.
#.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 아이구, 아까워라. 그 부모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 것인가.
골목길 어르신 한 분이 혀를 찬다.
그리고는 고개를 꼬고 혼잣말로 자기 같은 살 만큼 산 사람이나 데려가지...뭐라뭐라 되뇌다가, 목숨이란 참 제 뜻대로 안 되는 일이라며 인생 깨달음으로 마무리를 해 주신다.
#.
어르신의 말씀이 아니라도 우리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아무일 없을 때는 살고 죽음이 내 생각 안에서 고분고분한 것 같은데, 결정적인 때에 이르면 내 생각범주를 뛰어넘은 문제로 여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수행이 깊거나 영적으로 맑은 사람은 간혹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기도 한다지만, 많은 경우 대비를 미처 다 하지 못하고 죽음을 대면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엔 죽음에 대한 대비는커녕 삶에 대한 준비조차 아직 시작도 못한 채로 저 세상으로 가 버린 안타까운 죽음들도 있다.
우리집 큰오빠도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친구 손에 이끌려 시외버스를 타고 있다가 고통사고가 나서 즉사한 경우이다.
죽은 오빠 편에서 나는 늘 열살이나 차이나는 어린 동생일 터이니 거기에 생사별리의 괴로움을 느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오빠의 죽음이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직간접으로 삶과 죽음에 관한 어떤 화두를 안게 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우리 가족 모두의 삶이 더 현명해졌는가?
거기엔 어느 한 가지로 대답할 수 없다.
많지 않은 가족이고 불과 몇 십년 동안이지만 던져진 화두를 제각각으로 소비하며 있는 힘껏 튀어져나간 그 지점들이 너무나 천차만별이니 말이다.
우리 가족이 보여주는 바, 어쩌면 가까운 이의 죽음을 통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각각의 인격수양에 달렸고 시초는 선택의지일지도 모른다.
#.
이태원.
어딘지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다고 동경하던 땅.
이제 10월 마지막 주말의 슬픈 사건까지 함께 기억할 땅이 되었다.
작년 이맘 때던가, 한 젊은이의 죽음을 알고 나서 한강이 그저 한강만으로 기억되지 못할 것 같다고 썼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면 내가 이렇게 작은 추모를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게 아닌지.
우선 그래도 들어줄 귀가 있다면 가장 먼저 지상의 젊은이들에게 이 말을 해 두고 싶다.
소중한 생명, 인명은 재천在天이란 말도 있지만, 그래도 자기 스스로의 목숨을 언제 어디서 다가올지 모를 죽음의 위협에서 지켜내겠다는 경계심을 놓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자기생명의 수호자로 오래 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