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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 때 무용시간이었다.
그날 선생님은 우리더러 팀을 짜서 무대에 올릴 무용을 창작하라고 했다.
그렇게 당일로 팀별 안무를 내놓으면 점수를 매기겠다는 것이다.
우리 팀이 어떤 회의를 거쳤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껏 생생한 것은 무대 위에서의 한 순간 나 혼자만의 즉흥 율동이 있었다는 것.ㅡ 무대 위에서의 율동 중 어느 타임은 우리 팀 모두 엎드리기로 하였다. 그러기로 했던 것은 맞는데 펀뜻 그러한 단체 동작이 단조로울 것이란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이 가만히 있는 그 한정된 시간 안에 혼자 상체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몸부림을 표현하였다.
팀별 발표가 끝나고 선생님은 각 팀이 표현하려던 게 무엇이었는지 설명하라고 했다. 우리 팀엔 주리라는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애가 우리 팀의 무용 주제는 고뇌라며, 고뇌라는 것에 대해 뭐라 뭐라 설명했는데, 선생님이 그 대답에 흡족해하였다. 그 순간 나도 내심 만족했던 걸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애가 마치 나의 동작까지 계산한 것처럼 우리팀의 무대를 잘 설명하였고, 또 내 생각에 고뇌하는 사람은 그 고뇌를 이겨내려고 무지 노력할 테고 나처럼 일어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나는 그것을 알맞게 표현해냈으니까.
내 인생에 딱 한번 창작무용이었고 그 순간 나는 비록 아마추어의 즉흥일지라도 고뇌라는 개념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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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날의 무대, 일어나려고 몸부림하던 나의 몸동작이 생각나며, 인생의 어느 구비에서 넘어져서는 스스로 일어서고 싶어도 일어서지를 못해 몹시 괴로웠던 때가 있었음을 상기한다. 그리고 지나갔음을 확인한다.
홀로 분투할 때,
끝까지 응원해 준
고맙기 그지 없던 우인 한 사람과
내 영원한 멘토이실 스승 한 분이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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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그 시기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어영부영 행운에 끼어 흘러가는 걸 멈추고
새삼스럽게 제로(0) 지점에 다시 서 보았던"
몹시 실험적이지만 번민의 강도가 너무 심해 견딤만으로 지루하기조차 했던 계절이었다.
그리고 마음을 모른 체 말만으로 때우는 인연들을 강물에 흘러보낼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를 견디고 난 후는 생각이 어지럽지가 않다. 마음이 비워진 덕분이다,
두고두고 금의 무게를 버틸만한 중량은 진심이고 변치않음이리라. 이 두 가지를 내게 주신 분은 이 세상에 오직 스승 한 분뿐.
진심은 진심이 아니면 만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