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긴 하지만 성큼 내키지 않았는데, 그래도 군중심리라고 줄 뒤에 가서 기다렸다. 내 차례가 올수록 실제적으로 어떻게 요리해 먹는 게 나을지 궁리가 났다. 그러면서 이웃집 Y 할머니가 생각났다.
두 마리를 주시고요, 조각조각 잘라서 한 마리씩 따로 포장해 주셔요.
칼을 잡은 청년은 훌륭한 젊은이다. 아까부터 보는데, 한 마리건 두 마리건 너무 싼 값에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게 미안하다는 손님에게, 아니라고 하면서 고객이 주문한 대로 차근차근 다듬어 포장해 준다.
두 봉지의 닭고기를 할인 가격에 친절까지 얹어서 사 들고 나오니 기분도 좋다.
우리집이 있는 골목길 첫 번째 집에 Y 할머니가 산다.
슈퍼에서 마침 할인하길래 할머니 것도 샀어요.
반가워하면서 값을 치르겠다는 걸, 선물이라고 드렸다. 소소한 값으로 선물하여서 받는 사람이 기뻐하면 그 또한 즐거운 일 아니던가.
좀 들렀다 가지...
아녜요, 할머니. 제가 감기기가 좀 있는 거 같아서요...
그래? 그럼 얼른 가 쉬어요.
그렇게 집에 와 한숨 돌리고 있을 때, 똑. 똑.똑. 계단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Y 할머니였다.
이거.
손에 들고 온 것을 내미는데 감기약이다. 마파람이라는.
이거 먹고 푹 자요.
잠들기 전에 한 포 먹었다. 가루약인데 쓰지도 않고, 약간 고소한 맛을 내면서 목넘김이 부드러웠다.
푹 자고 일어났다.
땀에 젖은 옷을 갈아 입고, 이부자리도 햇볕 아래 펼쳐놓았다.
띠리리리.
Y 할머니다.
네에, 할머니.
일어났어?
네, 일어났어요...
우리집 냉장고가, 이번에 동에서 바꿔준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아... 냉동실에 넣어둔 것도 딴딴하게 얼지 않고.. 한번 와서 봐 줘.
네에, 옷 갈아입고 가 볼게요.
대답은 바로 했지만, 속으로는 에고, 나는 기계치인데. 가서 뭘 발견할 수나 있을까 스스로도 자신이 없는 채였다.
그래도, 나는 몇 발자국밖에 안 떨어진 이웃에 사니까 부르면 당장 달려갈 수는 있다. 이게 이웃사촌의 힘이다 싶어, 쪼르르 달려갔다.
잘은 모르지만, 1단계로 해 두었던 냉동실 스위치를 4단계로 올리고, 냉장실도 "동계"로 해 둔 것을 '강'으로 바꾸어 드렸다. 할머니는 한편 절전을 원하셔서, 오늘내일은 전기세 걱정보다, 우선 냉장고 냉기가 잘 나오나 시험해 보는 게 우선 아니냐고 설득도 해 드리면서.
그리고 돌아와 우유를 데우고 있는데,
또 띠리리리.
네에, 할머니.
내가 그 말을 한다는 것이 딴 말만 하다 보냈어.
어제 사다 준 닭고기, 끓여 먹으니 맛있어. 고마워. 요즘 내가 닭고기 먹고 싶은 걸 어찌 알고 사 왔는가...
나도 모를 일이다.
슈퍼에 내려가 볼 생각도 즉흥이었고, 할인 선전에 끌려 서 있다가 할머니 것까지 한 봉 더 살 생각이 난 것도 즉흥이었다.
그런데 저리 고마워하시다니... 덕분에 나는 그냥 견뎠을 감기에 약을 마시고 푹 잘 수 있었고... 기운이 없는 채로 오고 가는 인정을 느낀다.
정오가 지나니 햇살이 제법 찬란하여, 널어놓은 담요만 보아도 흐뭇하다.
그래도 머리끝이며 손끝은 으스스.
토요일이라 다행이지.
감기도 쉬어가라 하지 뭐.
문턱에 주질러 앉아 해를 보며 귤도 까먹고 책도 보는데, 채지충 만화의 '백사전'(白蛇传)에선 항조우 생각이 자꾸 맴돈다. ㅡ도시 항조우가 배경인 이야기이자, 호숫가뇌봉탑이 결말에서 중요하게 각인되어서 그럴 것이다.ㅡ 항조우의 아름다운 시후(西湖 , 서호), 너무 아름다워서 신비감으로 기억되는 그곳.
그런데, 사랑하는 내 부인이 요괴일지도 모른다면, 그 마음은 얼마나 복잡할까?
루쉰(鲁迅)은, 어릴 적 이 전설이야기를 듣고, 요괴 부인을 퇴치한 법사(法师)에게 분노를 느꼈다고, 어느 산문에 썼다. 오손도손 잘 사는 젊은 부부를 생이별시키는 종교가(宗教家)는 뭔가, 하고. 이런 루쉰과 같은 관점에서, 영화화된 '백사전'은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다.
그런데, 법사의 관점 또한 만만치 않다. 채지충이 근거한 이야기는 보다 법사 쪽에 가까운데, 요괴에 홀려서 얻은 행복은 가짜 행복이니, 하루빨리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러한 전개이다.
이렇게 요괴 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부가 자신의 반쪽을 상대하며, 저 사람이 대체 나를 행복하게 돕는 존재인가, 불행으로 이끄는 존재인가, 의혹의 눈빛을 거둘 수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아가씨 적에 나는, 멋진 인연으로 결합되어 함께 잘 살다가 차츰 서로에게 실망하더니 나중엔 아예 적개심에 가득차 서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영화로 본 적 있다. '장미의 전쟁'이던가...
어째서 저 지경에 이르도록 싸움을 멈추지 못하는지... 보면서도 이해하질 못했는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 내가 싫어하는 어떤 행태를 내가 고른 짝에게서 보게 되었을 때, 그 놀라움과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걸 부부의 정으로 잘 희석시키지 못하고 서로 엉겨 붙게 되었을 때, 제 살을 깎는 한이 있어도 도려내버려야겠다는 일종의 강박이 생기고, 그 강박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그걸 멈추는 길목에서 화해와 조화인가, 이별과 청산인가 가름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보다 체력이 부실하지만 않았어도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지도 몰라. 어쩌면이란 가정 하에서의 다른 가능성이다. 그렇지만 이 길로 오고 말았어... 나는 그렇다 치고 내 주위를 둘러싼 환경 어디에도, 내 건강을 도모할 여유나 지혜까지는 미처 준비가 없었던 상황이었어... 그때는.
...부실한 몸으로는 어쩌면 혼자가 나아. ㅡ이건 주장이 아니라 내가 나를 고려한 후에 이렇게 정리한 바이다.
띠리리리ㅡ 이번엔 엄마다.
으응, 엄마.
그런데 전화기 저편에 엄마 말고도 다른 목소리가 섞여있다.
엄마, 누구야?
손주며느리. 전화하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그래요? 잘 됐네요!
중국 산동(山东)에서도 11월 무렵 감기를 앓았다. 그때 위안을 준 여학생 캉롱이 엊그제 보내온 사진.
기쁘다.
엄마가 젊은 손주며느리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있는 오늘 이 순간이, 엄마를 대신해 너무나 기쁘다.
사실 나는 체질상 감기가 오면 마음 신경줄이 다소 예민해진다. 평소 슬긋이 강한 마음으로 넘기던 일도, 감기를 앓을 땐 자신에게도 미래에도 다소 비관적이 된다. 작년까진 감기가 한 달씩 오래가서 그 부작용인가 여겼는데, 이번 감기에도 마찬가지. 겨우 하루 사이에 일체의 낙관(乐观)이 감기 하나로 넘어지는 찰나와 같은 흔들림, 아스스하다.
그제 저녁부터 까스러워진 심사(心事)는 웬걸까, 스스로 이유도 모른 채 시달리는 중인데, 데운 우유를 마시고 나서 감기약을 두 포째 먹으면서야, 신체와 기분 상태의 직접적인 연결과 그 변화가 깨달아졌다. 여름 가을 건강하게 잘 지내느라 어느새 그걸 잊었구나, 내가...
아파서 그런 게야.
나으면 괜찮아져.
내가 나를 달래주는 토요일 오후. 그래도 하루 만에 바로 깨달아진 건, 아마도 이웃집 할머니와 용두동 엄마가 걸어온 전화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