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리즈물 공모에 뽑혔단 소식부터, 당선금 접수 수속, 그리고 원고를 써서 출판사로 넘기기까지 그럭저럭 2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아들, 올해 안에 책이 나온대.
축하축하!
폭죽을 쏘아주는 게 평소와 많이 다르다.
외국에 사는 외국인으로서 언어가 제1의 생존조건이라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모자는 거꾸로가 되었다. 엄마보다 아들의 생존력이 몇 배로 컸다. 그런 만큼, 아들은 엄마의 당선이 그다지 미덥지 않았던 모양, ㅡ당선금을 제대로 받기나 하는지 몇 번이나 되물어서, 내가 그동안 아들 눈에 이렇게나 구멍 난 허당이었던가, 혼자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아들만의 불안도 아니었다. 원고를 넘기는 시기가 공교롭게도 코로나19의 팬데믹이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전시 체재는 아니었지만 어딘지 경색된 국제관계, 무엇보다 미래를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공황 상태여서, 출판 진행을 자꾸 재촉하기도 조심스러웠다.
혹시 이러다 흐지부지 되는 거 아냐? 날짜를 헤아리다 보면 일말의 불안이 스멀거렸다.
저쪽에선 내가 무던하게 기다려 준 게 고마운지, 그동안 ㅡ외국인 저작물이다 보니ㅡ저자인 나 모르게 심사를 한번 더 거쳐야 했다는설명과,
교정본인데 보라고, PDF 문서를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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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번역을 거쳐 한자로 인쇄된 문장, ㅡ모국어가 아닌 이상 나는 능란하지 않다. 그래도 눈에 띄는 대로 몇 군데 수정이 필요하다고 체크하여 전송하고, '서문(序文)'을 보완하고, 그러고 나서, 틈 날 때마다 한 편 한 편 책장을 넘겨본다. 그러는 사이 날은 더워지고 나는 체력이 떨어져 한두 주가 훌쩍 지나갔다.
그래도 내심 즐거운 것이,
이런 구절은 내가 썼지만 참 여운이 있네!
간간이 ㅡ나로선 드물게 겪는ㅡ'자뻑'(자기의 것에 심취해 득의양양해짐) 증세로 세상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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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자뻑도 무더위는 어쩔 수 없는지, 후줄하게 늘어진 몸 때문에 정신없는 7월의 하루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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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문득,
내 원고의 한 부분을 채워준 노(老)시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연락하고 한번 찾아뵈야지?언제가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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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인과 한 약속 때문에, 비록 구두로만 주고받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중에 제가 수필집을 내면 이 시의 제목을 그대로 써도 될까요?
노시인은 좋지,라고 하며, 그때가 되면 전화 한 통 넣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원고 중의 한 문장 안에 그분의 시 한 수를 싣긴 했는데,
책 제목은다른 것으로 정해졌다.
그래도 책이 나오기 전 그런저런 사정을 알려드리고 감사 인사도 겸하고 싶어진 것이다.
그 사이 전화번호를 잊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아. 이제 어데로 물어야지?
연락처를 알아내는 일에 대하여 이런저런 궁리만 굴리다가, 오늘은 모처럼 첫 실행으로 인터넷을 열고 시인의 성함 석 자를 써넣었다.
문인수.
화면에 좌르르 관련 내용들이 보이는데 게 중 날짜상 최근의 것으로 열었다.
6월 7일 별세.
늦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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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일 전에만 연락드렸어도....
그러나 파킨슨병을 앓다 돌아가셨다니, 직접 말씀드리긴 어려웠을 거야.
어언 5년여의 세월 동안,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기겠거니, 혹은 적당한 때에 내가 한번 찾아뵐 수 있으려니 안심하고 있었던 건데, 후루룩 인연이 비껴가 버렸다.
하긴 그날 밤 인상에도, 시인은 시종벽을 기대고 앉아있어서, 저 정도로 쇠약한 몸인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세상에 태어나 그처럼 공감능력이 비상한 사람은 처음이었어. 매우 영( 灵)적인, 마음과 마음의 전달에 거침없는.
누군가의 시낭송과 함께 지척의 눈앞에서 서로 얘기도 나누었던 순간에 번졌던 감동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언젠가 꼭 다시 만나야지 맘먹고있었는데... 그냥 그렇게 딱 한 번의 만남으로시인은 이미 떠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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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먼길을 가노라고 시인은 시를 잊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약속을 못 지킨 사과를 겸해, 여기에 그날 밤 내 영혼을 홀렸던 시인의 작품 한 편을 올려 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