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를 만들고 싶어?(1)

유리창과 화실

by 새벽종 종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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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부캐 붐'이 한창이다.

이름 하나 더 붙이고 역할 하나 더 하면 되는 일인가 했다. 재미있어 보였지만, 나는 그냥 웃어주기만 하면 되었는데.... 단선적인 나, 이 하나로 살기에도 너무 벅찼으니까.

연꽃이고 싶어? 여뀌풀이고 싶어?ㅡ꽃한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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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멀리 살고 있는 어느 가난한 공주 이야기. 이야기라기보다는 신문 기사였다.

간호사 출신의 도시의 싱글맘, 그녀의 딸은 어린 눈에도 자기 집은 항상 부족한 살림이었고, 언제나 아빠가 없었다. 유치원 행사에 아빠가 참여해야 하는 날, 엄마는 아빠가 왕이라서 참가해 주지 못한다고 했다.


그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채 몇 년.

엄마의 설명이 너무 없었던 데다, 자신이 진짜 공주라고 믿기엔 현실이 너무 들어맞지 않아서,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없었다.


믿든 안 믿든 엄마는 그 엄연한 사실의 증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차례,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소국小国 왕으로서 어떤 권위와 절차를 거느리고 다른 나라의 도시에 사는 딸을 찾아와 '접견하고 가는 아빠가 있었다.


그런 권위적인 자리에서는 소녀가 아빠에게서 느끼는 친밀함이나 반가움 같은 게 솟아날 리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소녀는 그 아빠를 믿고, 아빠의 왕궁에 들어가 보기도 한다. 왕의 자녀라도 사생아는 입궁이 금해져 있는 그 나라의 법이 있어서, 근위대에게 메모 한 장 아빠에게 전해달라고 하여, 마치 왕을 존경하는 추종자가 특별한 기회를 얻어 궁궐을 참관하는 형식으로, 공주는 아버지의 성 안을 밟아 보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나라는 당연히 이렇게 소리 없이 지내는 공주가 있다는 걸 모른다. 몰라도 된다.

아버지는 서거하였고, 공주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덴 변함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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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어딘가는 산불이 엄청나고, 지구 어딘가는 홍수로 지하철이 잠겨서 그 안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있고, 내가 오가는 동네의 거리는 요 며칠 땡볕이! 작렬하고 있다.


그래도 외출하고 돌아올 때,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서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려 나의 집이 있는 골목길 쪽을 건너고자 서 있을 때, 나는 길 건너 골목이 열리는 왼편으로 푸른 유리창의 빌딩을 무슨 신기루나 보듯이 바라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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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 유리벽, 그 안에는 허공에 떠있는 이쪽의 세계가 있다. 비록 반영이긴 하지만.

지표면에 발붙인 채로인 나의 시점에서 보면, 빌딩의 2,3층 유리창에 떠오른 상가며 아파트 건물들의 상부와 아주아주 푸른 하늘, 원래가 푸른색 유리창이라서 그 안에 창공은 현실보다 더 짙은 푸른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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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1층이 식당이라서, 2층부터가 유리창의 반영이니까 지표면의 내가 비쳐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유리창의 반사면이 내가 서 있는 쪽을 향하고 있는 이상, 만약 시점을 높이면 횡단보도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내가 내려다보일 지도?


아무래도 상관없다.

거기 이 세계의 일부분이 비치는 한, 내가 그 안에 존재하는 건 틀림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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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나도 부캐를 만드는 요즘,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아서일까.

언젠가부터 나는 신호 대기 중인 그 잠깐 동안, 나의 부캐 하나를 길 건너 풍경의 거울 속으로 들여보내곤 한다.

넌 거기서 살아.

어쩌면, 내가 허락하기 전부터 일찌감치 또 다른 나 하나가 유리창에 반영되는 건물 중 어느 창가인가에서 언뜻언뜻 그림자를 내비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지만 아직 이름도 못 지어 주었는 걸....

아직 어떻게 살 건지도 정해준 바도 없다.

부캐의 이름은 외국식이 낫겠지.

그런데, 얼마나 더 지켜보아야 그 이름이 떠 오를까....


이렇게 아직 모든 게 희미할 뿐인 부캐이지만, 그래도 행복하기를,

소박해도 좋으니 하루하루를 나름 멋지게 채우는 그런 삶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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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 설정이 자꾸 미뤄지는 것은, 허구인 만큼 무엇이든 가능해서가 아닐까. 시시때때로 설정이 자꾸자꾸 바뀌는 바람에....


그날, 이 세상에 이런 식의 공주도 있다는 신문기사를 접한 날도 그랬다. 나의 상상은 이리저리 구르다가 나 자신이란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더니 언젠가 나와 옷깃을 스친 기억 속의 타인에게로 가 멈추었다. 엉뚱하게도, 이를테면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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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2층엔 화실이 있다. 동양화를 주로 그리는.

화실 아래층에는 상가 좁은 골목에 대야를 걸쳐놓고 영지버섯을 기르는 김밥집 할아버지 부부가 산다, 가령 그 김밥집 할머니. 사실은 김밥집 할머니란 살아 버티기 위해 내세운 그녀만의 부캐인지도 모른다. 원래는 왕족의 혈통을 이은 마지막 공주, 이러한 출신은 때로 너무도 강렬하여 눈에 잘 안 띄는 허름한 역할로 덮어놓는다. 어떤 사정 때문에 자신이 공주인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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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할머니가 언젠가부터 화실을 다니고 있다. 보통은 화가 선생님과 약속한 시간에 찾아가지만,

가끔은 아무도 없는 화실 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있다.

할아버지가 가게를 지켜주니, 손님이 적은 시간엔 화실로 올라와 그림을 그리곤 하는 것이다.

화실 선생님은 할머니와 이웃인 점도 있고 가족처럼 친해져서, 언제든 화실에 들러 그림을 그려도 된다고 말해준 터이다.

할머니는 지금 무엇을 그리고 있을까....

아니, 그림 그리기를 멈추고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

꿈꾸는 듯한 할머니의 눈이 가닿는 벽면에 호수가 보이는 누대楼台가 있다. 누대의 한쪽으로는 모란꽃이 만발한 화단이다. 화려하고 신비로운 누대의 지붕이며 기둥들, 물결이 찰름이는 호수며 정교하게 꾸며진 꽃밭, ㅡ할머니 눈에 너무도 친숙한 풍경이다.

모란이 피면 꽃잔치가 열리곤 했지.

사무치게 그리운 뜨락,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홀연 어린 공주가 꽃 사이로 환하게 웃으며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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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선생님이, 화실 문을 열고 들올 때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할머니 휴대폰 벨소리다.

할머니이!

'바빠서 휴대폰도 잊고 가게로 내려가셨나? 그럼, 조금 있다 돌아오시겠지.'

가끔 있는 일인 듯, 선생님은 예사롭게 책상 정리를 하며 다음 시간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화실 한켠 할머니가 사라진 자리 쪽엔, 방금까지 꽃잎을 그렸던 듯 흰 접시에 진홍물이 곱게 풀려 있는데. 그 옆으로 어딘지 세월이 묻어나는 인장 하나.

아버지 유품으로 낙관으로 쓸 만한 게 있다더니 그걸 찾아온 모양이네.

선생님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