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사회학’의 만남은 우연한 계기였다. 수시 원서를 접수하던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담임선생님이 물었다. “사회학이 무엇을 배우는 학문인지는 알고 지원하는 거니?” 모의고사 점수가 완만하게 떨어지고 있던 나는 어떻게든 수시로 대학교에 입학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대학교의 이름값을 위주로 선택하다 보니 뒤늦게 학과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회과목을 싫어하지 않으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라고 담임선생님에게 답한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서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사회학과에 진학하게 된 걸 뼈저리게 후회하기도 했지만, 가슴 한편 접하기 어려운 세상에 대해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는 여성, 노동, 아동, 장애인, 시민사회 등 주류가 아닌 소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수업이 많았다. 지금은 페미니즘이 미디어에 종종 노출돼 대중에게 익숙한 단어가 됐지만, 2000년대 후반에는 다소 생경한 표현이었다. 오만하게도 나는 사회학을 공부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다고 의기양양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편견이 많이 옅어졌구나, 때로는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헛된 신념이라는 걸 인지하는 데 그리 오래지 않았다. 회사생활을 하며 자연스레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됐다. 야속하게도 사회생활을 굴곡 없이 보내는 방법 중 하나는 무리에 속해 외부의 상대를 재단하는 데 참여하는 일이다. 이따금 나는 말과 글로서 선입견을 드러냈다. 특히 누군가를 비판하는 글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었다. 타인에게 생채기를 내는 글을 수도 없이 썼다. 곧 내게는 없다고 자신했던 선입견은 인형연극처럼 무대 뒤에서 나를 조종했다.
인디언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그의 모카신을 신고 두 개의 달 위를 걸어볼 때까지 그를 판단하지 말라. 이에 대해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을 쓴 구병모 작가는 “하늘에 나타날 수 없는 두 개의 달에 초점을 맞추자면, 인간이 자기와는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일 자체가 본질적으로 불가능함을 뜻할 것이다”라고 했다. 타인을 완벽하게 받아들이는 게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는 영원히 선입견 속에서 표류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선입견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선입견이 행동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문장처럼 말이다. 돌이켜보면 사회적 소수자의 이야기에 고민하던 대학교 재학 시절, 나는 선입견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의식적으로 말과 행동에서 선입견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한 차례 스스로에게 절망했던 나는, 틈틈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 같은 행동이 스멀스멀 몸 밖으로 나와 움직이려는 나의 선입견을 조금이나마 움츠리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의 핵심은 합리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어 임마누엘 칸트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식 대상을 문제 삼기 전에, 인식 주체의 능력을 비판적으로 판단해 봐야 한다고 말했다. 즉, 인간 이성의 한계에 대해 언급했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판단을 중지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작년 발간한 <지식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의 프롤로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파잔은 코끼리를 인간에게 길들이기 위해 영혼을 파괴하는 의식이다. 코끼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고 몇 날을 굶기고 구타하며 야생성을 죽인다. 이를 버티지 못하고 많은 코끼리가 죽지만, 몇몇은 살아남아 관광객을 태우는 돈벌이 수단이 된다. 우리는 코끼리에게 몽둥이를 든 사람들에게 분노하지만, 그들의 가난한 삶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선악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들의 영혼도 코끼리와 같이 산산이 부서진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