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가는 노랫말이 하나 있다. 가을이 되면 괜스레 스트리밍 애플리케이션으로 손이 움직이며 더 듣게 된다. 스탠딩에그의 <시간이 달라서>는 이별을 맞닥뜨린 남성의 시선에서 가사를 풀어간다. 연애 초기 여성의 애틋한 사랑에 무심했던 남성이, 헤어짐을 경험하고 뒤늦게 떠나간 사람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가사에서는 이별을 서로의 시간이 달라짐으로 표현한다.
그때는 네가 날 기다렸고, 이제는 내가 널 기다리고, 시간이 달라서 만날 수가 없어
사랑이라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100도가 되면 어김없이 끓는 물이 아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때로는 상황에 가로막혀 오롯이 사랑만을 향유하기가 힘들다. 초라했던 나의 첫사랑도 그랬다. 한 살 많았던 그녀는 철없던 나의 대학생 새내기 시절을 지켜봐 줬다. 그녀만을 바라보지 못했던 나의 시간이 흐르고, 자연스레 군대라는 사회와 떨어지는 공간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무한히 쏟아내는 시간도 지나가고 있었다. 취업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나는 <시간이 달라서>라는 노랫말처럼 꽤 많은 시간을 후회라는 감정에 갇혀 지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특수성으로 남성과 여성의 사회 진출 시기가 다르다. 이 때문에 <시간이 달라서>라는 노래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이끄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첫사랑에 성공하고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는 주변의 지인을 보면 더욱 그 만남을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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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의 다솜을 끝맺고, 새로운 만남에 소극적으로 변해갔다. 정확히 말하면 상처 받기 싫어 마음을 꺼내는 데 주저했다. 연애를 했지만, 마음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마음에 난 생채기 때문이었다. 다시 시작하려는 용기가 부족했다. 이따금 무심하게 헤어짐을 바라봤다. 마치 나의 일이 아닌 모양새로 말이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는, 지금 생각하면 과거의 나를 꼬집고 싶다.
사랑이라는 테마로 조금 더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다른 사람의 연애를 조언하는 데 극히 조심스럽다. 공감을 받기 위해, 가끔 해결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연인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단순히 위로하려 애쓴다. 당장 위기를 모면하려고 설익은 해결책을 건네지 않는다. 또한, 내가 알지 못하는 연인과의 상황이 존재하기에 섣불리 공감하려 힘쓰지 않는다.
결국 위기를 이겨내는 건 당사자의 몫이다. 같은 공간에 서 있는 두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이다. 적어도 한 사람이 상대가 모자람 없이 온전하게 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중할 때까지 기다린다면 조금 삐걱거리고 불안하더라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끝내 하지 못했지만, 분명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문뜩 생각이 감돌았다. 어쩌면 사랑과 기다림은 같은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