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일기 #1. 갑질도 진화한다

그럴 거면 챗GPT랑 일하지, 왜 나랑 하냐?

by heavenlyPD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새 메시지 알림이 떴다.

제목: "아이디어 회의 요청"


심장이 쿵 했다.

좋은 쿵이 아니라, 불안한 쿵.

10년 차 프리랜서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다.


이번 콘텐츠는 '전시장 소개'.

구성에 참고하라며

클라이언트가 SNS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패턴 인터럽트'라는 마케팅 용어 설명글이었다.


이건 또 무슨 신종 갑질인가 싶었지만

일단 차분히 읽어봤다.


기존 틀에서 벗어나 고객의 시선을 끌 수 있다는 개념이란다.

쉽게 말해, Out of Box.




웃음이 나왔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 클라이언트와 일한 지는 3년 째다.


그동안 획기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획기적이고 좋은데 조금 과하네요”

“저희 톤이랑 안 맞네요”


물론, 우리가 제안한 아이디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항상 무난하고

평범한 방식만 고수한 건 그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한테 틀을 깨라고?




메일 내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결정타는 따로 있었다.


"챗GPT한테 가볍게 질문 던져봤습니다. 참고하세요^^"


자기가 챗GPT한테 물어본 결과를 공유한 것.

AI가 제안한 아이디어는 이랬다.


● 조선시대 복장을 한 관람객이 최신 기술을 체험한다

● 몰래카메라로 관람객의 리얼 반응을 담는다

● 현장에서 관람객 4~5명을 섭외해 퀴즈쇼를 진행한다


.........네?


혹시나 해서 클라이언트한테 물어봤다.

“과장님, 혹시 여기서 '관람객'은

재연 배우를 섭외하라는 말씀일까요?”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요. 작가님~

리얼리티를 살리려면

실제 관람객을 섭외해야죠"


이 글을 읽으며

‘설마~~’라고 할 분이 있겠지만

이건 100% 실화다!




클라이언트가 공유한 아이디어는

겉으론 그럴싸하지만

현실성은 제로였다.


전시장 인파 속에서 조선시대 복장을 입고,

초상권까지 허락해 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좋다, 미친 척하고

섭외를 시도한다고 하자.


그 넓은 전시장에 수 천명의 사람들이 있을 텐데

제한된 시간 안에 섭외하고 촬영까지 할 수 있을까?


이건 아이디어가 아니라 판타지 소설이다.

그것도 3류 판타지.




AI시대에 AI한테 물어볼 수 있다.

백 번 양보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걸 검증하지도 않고

“AI가 하래요~” 하며 그대로 제작팀에 던지는 태도다.


그리고 우리가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어렵다고 하면,
“시도도 안 해 보고 왜 안 된다는 말부터 하시냐'며

우리 제작팀의 능력 부족으로 몰아간다.


트렌드? 좋다.

틀 깨기? 필요하다.
독특함? 반갑다.


하지만 예산, 시간, 현장 제약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실행 불가능한 판타지를

능력 검증의 도구처럼 던지는 건

명백히 '갑질'이다.




그런데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우리도 언젠간 AI한테 대체되는 건 아닐까?”

“아니, 이 클라이언트 마음 속에선 이미 대체된 건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 우리를 AI와 비교하면서 압박하는 건 아닐까”


뜬금없는 전개 같지만

AI시대에 새로 생긴 불안이다.


분노와 불안이 뒤섞여 감정적으로 힘든 순간,

오늘 아침에 읽은 성경 말씀이 떠올랐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잠언 15:1)


"그런데 주님,

도저히 유순한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요...ㅜ.ㅜ"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럴 거면 챗GPT랑 일하지. 왜 나랑 하냐?”




P.S. 다음 날, 결국 미팅에서 클라이언트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현실적으로 어렵네요. 기존 구성안대로 가시죠^^"

웃는 얼굴에 침 뱉을 뻔했다.


그래도 '이건 안 될 거다'라는

10년 차의 예측 능력이 증명된 하루였다.


아직 AI가 못 따라오는 것도 있다.

아니다…. 언젠간 이것도 학습하겠지?


젠장, 모르겠다!

그때까지는 내가 이기는 걸로 하자.


#프리랜서 #현실 #갑질진화 #AI시대 #나이스한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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