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의 교과서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녹화 당일 아침.
휴대폰 진동에 눈을 떴다.
분명 어제 '최종 컨펌'까지 받았던 대본인데,
갑자기 수정 요청이 들어와 있었다.
수정 내용을 확인해 보니,
"살펴보고 → 살펴보며"
"과정도 → 과정 역시"
처음엔 두 눈을 의심했다.
틀린 그림 찾기인가...?
“이게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네요. 주님…”
세상에, 조사 두 개 바꾼 걸
'긴급 수정 사항'이라며 메일로 보내온 것이다.
하지만 프로는 감정을 다스린다.
일단 찬송가를 틀고, 커피 한 잔 마시고, 심호흡 한 번.
그리고, "네, 수정하겠습니다”라고 답을 보냈다.
대본 수정 요청에는 두 가지 패턴이 있다.
▪︎ 첫 번째
고쳐도 그만, 안 고쳐도 그만인 내용을
수정사항이라고 던지는 것.
▪︎ 두 번째
단어 하나가 문장의 의미를 바꾸고
맥락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데도,
그저 갑이 보기에 별로라는 이유만으로
고치라고 하는 것
클라이언트가 요청하면 우리는 당연히 수정한다.
왜? 그게 우리 일이니까.
문제는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가끔 조심스럽게 다른 의견을 내면,
돌아오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좋은 '갑'들도 있다.
이건 이상한 갑들 이야기다)
▪︎ 반응 A. 권위로 밀어붙이기
"저희 회사 기조가 그렇습니다. 수정하세요"
(속마음, "그냥 내 맘에 안 들어")
▪︎ 반응 B. 작가로 빙의하기
갑자기 '대본 작법 마스터 클래스' 강의를 연다.
우리는 글로 밥 먹고 사는 전문가다.
(누군가 그랬다. 그 일로 돈 벌면 '전문가'라고)
나의 글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뜻이 아니다.
갑의 글쓰기 능력을 평가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를 무능한 작가로 취급하는 태도,
그게 불편할 뿐이다.
예전에 지인을 통해 들은 레전드급 사건이 있다.
한 기업의 사내영상 담당 부장이
PD와 작가들을 급하게 소집했다.
그리고 무려 1시간 넘게
연출론과 시나리오 작법에 대한 강의를 했다.
10년 차, 15년 차 베테랑들 앞에서 말이다.
제작팀은 그걸 ‘만행’이라 불렀다.
멘붕과 현타가 동시에 왔고,
그 이후 PTSD까지 남았다.
나는 전해 듣기만 했는데도
트라우마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내가 직접 겪은 사건도 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작가님의 부탁으로
한 기업 작업을 맡았는데
그 회사는 회의를 엄청 자주,
그것도 무조건 대면으로 했다.
영상 시사도 대면, 대본 시사도 대면.
회의가 취미인 줄 알았다.
영상 시사를 대면으로 하는 건 가끔 있다.
하지만 대본 시사를 대면으로 한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21세기다.
메일로 주고받으면 될 일을 왜 굳이?
진정한 레전드는
그 회사 팀장의 피드백 스타일이었다.
말 그대로, 갑질의 교과서를 보는 듯했다.
영상 재상과 멈춤을 반복하면서
그의 입에서는 이런 말들이 쏟아졌다.
"강원도 시골 초등학교 방송반이 만들어도
이것보단 낫겠네”
(많이 순화한 표현이다)
욕은 아니었지만,
욕처럼 들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분이었다.
작가들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수정 사항을 일일이 말해줘야 하는
작가라면 능력이 없는 거예요"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기업 영상은 당연히 일일이 수정 사항을 말해줘야 한다.
아무리 글을 잘 써도 그 기업만의 용어,
그 기업이 추구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간곡하게 부탁하셔서 우선 1편만 해보자 했는데
작가들이 왜 그만두는지 그날 뼈저리게 알았다.
회의하는 내내 마음속으로
‘주여’를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온 말에 더 경악했다.
- 지상파 작가 출신? 그거 아무 의미 없는 경력이다
- 우리 회사 일을 한다는 걸 영광인 줄 알아라.
믿기 힘들겠지만, 100% 실화다!
처음엔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하다가
나중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ㅋㅋㅋ
그런데 일을 같이 하면 할수록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게 자랑할 만한 건
‘이 회사 직원’이라는 타이틀뿐이었으니까.
언젠가 이 회사를 떠날 날이 오면,
그는 무엇을 붙들고 살아갈까.
허울뿐인 과거를 자랑삼아 살겠지.
그런 생각이 드니까
오히려 마음에 긍휼함이 생겼다.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자.
우리가 쓰는 대본은 책이 아니다.
'읽히는 글'이 아니라
'들리는 글'이라는 의미이다.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발화할 수 있어야 하고,
시청자 귀에 닿았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글이다.
그런데도 많은 클라이언트들은
대본을 ‘글자’ 그대로 평가하며
말도 안 되는 수정을 요청한다.
그것까지는
‘갑도 갑의 일을 하는구나’ 여기며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작가의 수고와 의도를 가볍게 여기고,
심지어 소모품 취급하기까지 한다.
작가에게 수정은 일상이다.
건설적인 지적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인다.
하지만 ‘무지한 지적', '존중 없는 피드백',
그리고 '우월한 태도'는 사절이다.
이게 바로 내가 '지적'이 아닌,
'지적질'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지적에도 품격이 필요하다는 걸, 그들은 왜 모를까?
지적에도 품격이 있고, 자격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저질이고, 자격이 없다.
P.S. 그 기업에서 여러 번 더 연락이 왔지만
매번 정중하게 거절했다.
돈도 중요하지만, 내 영혼이 더 소중했다.
가끔 '혹시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품격 없는 지적은 정말 NO다!
그때 ‘거절’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조금 덜 먹고 조금 덜 쓰면 될 일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