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춤'을 선택하다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한 프로덕션 대표님에게 연락이 왔다.
현재 내가 프리로 일하고 있는 곳이다.
사실 일을 시작할 때를 빼면
거의 통화할 일이 없는 분이라
조금 긴장이 됐다.
"작가님,
요즘 OOO 때문에 너무 힘드시죠?
잘 알고 있습니다."
/
"괜찮습니다.
클라이언트들이 다 그렇죠 뭐."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위로의 전화인가...?!
그런데 대표님은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지,
얼마나 잘 버텨왔는지를
한참이나 이야기하셨다.
듣다 보니,
뭔가 꺼내기 어려운 얘기가 있겠구나 싶었다.
"작가님, 제가 늘 감사하게 생각하는 거 아시죠?
근데요...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려야 할 거 같아요."
잠시 침묵,
그리고 이어진 깊은 한숨
"그 OOO이 작가 교체를 요구하네요..."
이거였구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네, 알겠습니다."
억울하다고 따지지 않았다.
이유도 묻지 않았다.
"다음에 더 좋은 기회로 연락드릴게요"
형식적인 위로와 함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전화를 끊고
화면이 꺼진 핸드폰만
한참을 쳐다봤다.
그 안에 비친 내 얼굴을 본 순간,
화면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괜찮은 줄 알았다.
아니, 괜찮아야 했다.
솔직히,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이 기업은 유난히
말도 안 되는 수정이 많았다.
처음에 기획했던 방향을
통째로 뒤집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쓴 대본을 한 줄만 남기고
전부 갈아엎은 적도 있었다.
이 기업 작업을 하면서
작가로서의 자존감이 무너지고,
자괴감이 든 순간이 수없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OOO라는 사람에게
평균 두 시간씩 훈계 아닌 훈계를 들었고,
말도 안 되는 수정안을
그럴듯하게 바꿔내야 했다.
결국.. 서러운 눈물이 터졌다.
이건 명백히, 부당한 해고다.
억울했고, 분했다.
그동안 견디느라 애쓴
나 자신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5년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었다.
당시 3년 동안 일한 기업에서
작가들을 모두 교체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프로덕션에서는 클라이언트와 논의를 하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때는 순진하게도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함께 일하던 PD가 자기 지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나만 교체했다는 걸 알게 됐다.
평소에 유독 나에게만 까칠하게 대하던 PD였다.
이유를 몰라서 답답했지만,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그런데, 결국 잘린 건 나였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그 PD의 태도보다
나를 더 슬프게 만든 건
증명할 길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올해 5월,
프리랜서 방송작가들이 지역 MBC와
첫 단체협약을 맺었다는 기사를 봤다.
방송작가들에게는
자신들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방송사 안에서 일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다.
외주 프로덕션 작가나
기업·관공서 콘텐츠를 만드는 구성작가들에게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다.
갑질일기를 쓰면서
분노했고, 슬프기도 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내가 이 일을 사랑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으니까.
그 마음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하지만,
억울하게 잘려도
그저 조용히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아프다.
그래서 '잠시 멈춤'을 선택하기로 했다.
사실 이번 시리즈를 연재하며
내 꿈에 한 발 더 다가섰다고 생각했다.
'갑질일기'를 드라마로 만드는 꿈.
매주 두 편씩 쓰는 일이
쉽진 않았지만 즐거웠다.
하지만, 그 꿈도 잠시 pause... 하려 한다.
꿈꾸기를 멈추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멈추지 않는 걸음이
결국 실상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니 잠시,
아주 잠시만 쉬자.
이 시간도
내 이야기의 일부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