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일기 #11. 부당 해고지만...

'잠시 멈춤'을 선택하다

by heavenlyPD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한 프로덕션 대표님에게 연락이 왔다.

현재 내가 프리로 일하고 있는 곳이다.


사실 일을 시작할 때를 빼면

거의 통화할 일이 없는 분이라

조금 긴장이 됐다.


"작가님,

요즘 OOO 때문에 너무 힘드시죠?

잘 알고 있습니다."

/

"괜찮습니다.

클라이언트들이 다 그렇죠 뭐."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위로의 전화인가...?!


그런데 대표님은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지,

얼마나 잘 버텨왔는지를

한참이나 이야기하셨다.


듣다 보니,

뭔가 꺼내기 어려운 얘기가 있겠구나 싶었다.


"작가님, 제가 늘 감사하게 생각하는 거 아시죠?

근데요...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려야 할 거 같아요."


잠시 침묵,

그리고 이어진 깊은 한숨


"그 OOO이 작가 교체를 요구하네요..."


이거였구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네, 알겠습니다."


억울하다고 따지지 않았다.

이유도 묻지 않았다.


"다음에 더 좋은 기회로 연락드릴게요"


형식적인 위로와 함께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전화를 끊고

화면이 꺼진 핸드폰만

한참을 쳐다봤다.


그 안에 비친 내 얼굴을 본 순간,

화면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괜찮은 줄 알았다.

아니, 괜찮아야 했다.




솔직히,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이 기업은 유난히

말도 안 되는 수정이 많았다.


처음에 기획했던 방향을

통째로 뒤집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쓴 대본을 한 줄만 남기고

전부 갈아엎은 적도 있었다.


이 기업 작업을 하면서

작가로서의 자존감이 무너지고,

자괴감이 든 순간이 수없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OOO라는 사람에게

평균 두 시간씩 훈계 아닌 훈계를 들었고,

말도 안 되는 수정안을

그럴듯하게 바꿔내야 했다.


결국.. 서러운 눈물이 터졌다.


이건 명백히, 부당한 해고다.

억울했고, 분했다.


그동안 견디느라 애쓴

나 자신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5년 전에도

비슷한 일을 겪었었다.


당시 3년 동안 일한 기업에서

작가들을 모두 교체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프로덕션에서는 클라이언트와 논의를 하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때는 순진하게도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함께 일하던 PD가 자기 지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나만 교체했다는 걸 알게 됐다.


평소에 유독 나에게만 까칠하게 대하던 PD였다.

이유를 몰라서 답답했지만,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그런데, 결국 잘린 건 나였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그 PD의 태도보다

나를 더 슬프게 만든 건

증명할 길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올해 5월,

프리랜서 방송작가들이 지역 MBC와

첫 단체협약을 맺었다는 기사를 봤다.


방송작가들에게는

자신들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방송사 안에서 일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다.


외주 프로덕션 작가나

기업·관공서 콘텐츠를 만드는 구성작가들에게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다.




갑질일기를 쓰면서

분노했고, 슬프기도 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내가 이 일을 사랑한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으니까.


그 마음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하지만,

억울하게 잘려도

그저 조용히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아프다.


그래서 '잠시 멈춤'을 선택하기로 했다.




사실 이번 시리즈를 연재하며

내 꿈에 한 발 더 다가섰다고 생각했다.


'갑질일기'를 드라마로 만드는 꿈.


매주 두 편씩 쓰는 일이

쉽진 않았지만 즐거웠다.


하지만, 그 꿈도 잠시 pause... 하려 한다.

꿈꾸기를 멈추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멈추지 않는 걸음이

결국 실상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니 잠시,

아주 잠시만 쉬자.


이 시간도

내 이야기의 일부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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