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일기 #16. 내가 썼는데, 내가 안 쓴 것 같은

AI 시대 구성작가로 산다는 것

by heavenlyPD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요즘 대본을 쓰면서

AI 트렌드 관련 자료를 많이 본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AI는 더 이상 미래가 아니라, '지금'이구나"


맞다. 인정한다.

나 역시 매순간 그 변화를 느끼고 있으니까.


AI를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업무 효율은 두 배로 오르고,

반복 업무는 사라지고,

사람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안 쓸 이유가 없다.

아니, 안 쓰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AI 시대를 바라보게 된다.


나는 창작자다.

비록 소설을 쓰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야기를 구성하고

‘문장을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


그런데
AI에게 뼈대를 빌리고,
AI에게 단어를 받으면...
과연 내가 쓴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AI 활용을 망설이는 이유다.


어디까지 허용하게 될지 두렵기도 하다.

처음에는 자막만 부탁하다가

나중엔 대본 전체를 맡기게 될까봐.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마치 배달 음식이 몸에 안 좋다는 걸 알면서도

편해서 쉽게 끊지 못하는 것처럼.




얼마전 이런 뉴스를 봤다.


연세대 학생들이 비대면 시험을 보는데

AI를 사용해 부정행위를 하고 징계를 받았다는 소식.


그 뉴스를 보면서

‘이 시대의 창작과 윤리’라는 문제를
처음으로 아주 현실적으로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생성형 AI는 더 이상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명확한 기준과

가이드라인은 아직 없다.


그 혼란 속에서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감각으로 선을 긋고 있을 뿐.


어제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클라이언트가 A4 용지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작가님, 제가 챗GPT에 물어본 구성인데

참고해서 정리해 주세요.”


클라이언트가 AI를 사용하는 걸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받아든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 존재가
조금 얇아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대본의 출발점이

AI에게서 나왔다는 사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내가 하는 일의 의미가

한 뼘쯤 줄어드는 것 같았다.


이건 감성적인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정확하게 현실을 인지하고

대응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순간일지도.


그럼에도,

마음이 스산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썼는데,

내가 안 쓴 것 같은 글들.


내가 만든 건데,
내가 만든 것 같지 않은 결과물.


AI 시대는 분명 기회를 준다.
그래서 나도 잘 쓰고 싶다.


누군가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더 창의적인 판단을 돕는 방식으로.


그래서, 피할 수 없다면

더 잘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나의 것'을 어디까지 인정할지

스스로 방향을 잡아가야 하겠지.




AI 시대에 창작자로서의 경계는

아직 모호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야기를 구성할 때의 기분 좋은 긴장감,

문장을 다듬고 다시 쓰며 느끼는 집중과 성취감

그건 AI가 대신할 수 없는 감각이다.


이 감각들이야말로

작가로서의 나의 존재를,

내가 쓴 이야기임을,

내가 만든 문장임을

증명해주는 것들이다.


그래서 난 이 감각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AI가 아무리 좋아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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