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일기 #17. 떨어지길 바라는 입찰

을들에겐 잔혹한(?) 11월

by heavenlyPD

❉'갑질일기'는 철저히 '을'의 관점에서 쓴 기록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고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노를 배출하는 통로 역시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11월이 되면 항상 공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기온 때문에? 아니다.

을들의 전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년도 사업의 경쟁 입찰이

이맘때 한꺼번에 열리면서

제작사, 에이전시, 프리랜서들에겐

일종의 '종합 스트레스 기간'이 된다.


쉴 틈 없는 노트북 키보드.

제안서 작업 하나 끝나면,

또 다른 녀석이 기다리고 있다.


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기획하는 일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그나마 잘 견디는 편이다.


그런데 올해는 다르다.


여러 제안서 중에

내가 정말… 정말…

하고 싶지 않은 기업이 하나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최강빌런 때문에.


일 자체는 좋다.

프로젝트 자체도 재미있고,

기업의 문화나 방향성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모든 장점이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하고 싶은 일도

하기 싫어지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


그 능력 하나는

글로벌 Top일 것이다.




나는 프리랜서다.


하기 싫으면

"이번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냥 빠지면 된다.


하지만 사람의 관계라는 게

그렇게 무 자르듯 자를 수만은 없다.


지금까지 쌓아온 신뢰,

최강 케미를 자랑하는 제작진까지 생각하면

'그만두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 사람' 때문에 일을 포기하는 건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


일을 하느냐 마느냐

이 둘 사이에서 조금씩 지쳐간다.


그래서 나는 요즘, 특별한(?) 기도를 드린다.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경쟁 입찰에서 떨어지게 해 주세요"ㅎㅎㅎㅎ


프로덕션 입장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입찰이겠지만,

떨어진다면 나는 마음 편히 빠지고,

최강빌런과의 악연도 끝낼 수 있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프로덕션 입장에서는 엄청난 손해일 테니

나에게만 좋은 해결책이긴 하다ㅋㅋㅋㅋ


한쪽은 떨어지기를 바라고,

다른 한쪽은 이기기를 바라니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


하지만 결국 둘 다

을의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하다.


그래도 오늘 제안서를 쓰며 또 기도한다.

"떨어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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