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와인

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2

by 박나비

“10화 잘 읽었고, 시즌2는 다음 주부터 시작하자!”


10화를 올리자마자 친구 L 이 잘 읽었다는 말을

저렇게 보내온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친구들도

불쑥불쑥 한 마디 씩을 보탠다.

그중 가장 너그러운 편인 S가 추석 연휴는 푹 쉬고

연휴가 끝나면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고,

아주 점잖게 얘기한다.

정말이지 눈물겨운 배려가 아닐 수 없다.


맡긴 글을 찾으러 온듯한 이들의 당당함에,

마치 맡아 둔 글을 잃어버린 듯한 당황스러움과

미안함을 느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통이 아닌 녀석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간 사회에서 열심히 닳고 닳아

이제는 사람 하나 어르고 갈구고 달래는 데

이골이 난 이들이다.

이런 그들이기에 소년 감성의 가냘픈 내가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상대들이 아니다.


시즌1을 끝내면서 한참을 못 볼 것처럼 인사를

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시즌1으로 마무리하지

말 것을 그랬다.

후회와 깨달음은 언제나 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래도 시즌1이라는 묶음으로 한 번 묶고 나니

뭔가 뿌듯함도 느껴져서 기분은 꽤 좋았으니,

그래 그거면 됐다.


그리고 이렇게 한 사람이라도 읽어 주는 사람이

있을 때 열심히 쓰도록 하자.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 스토리,

이렇게 시즌2 시작.




제11화. 인생과 와인


오랜만에 G를 만났다.

쩌렁쩌렁 울리는 큰 목소리와 마치 뮤지컬을 보는

듯한 과장된 제스처가 특징인 사람인데,

오랜만에 본 G는 풀이 많이 죽어 있다.

하던 사업이 잘 안 되어서다.

아니 정확하게는 망해서다.

가게를 정리하고, 이래저래 심란한 시간을 보내다

영 견디기가 힘들었는지 한잔 하자고 불렀단다.


괜찮다며 힘내라고,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할 법한 하나마나한 소리를

하는 내게, 요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으니

삼겹살에 소주 한 잔만 하고 가자며

오래된 삼겹살 집으로 이끄는 G다.

그런 G의 뒷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뒤따라 들어간다.


평일 낮 시간이라 손님은 우리 밖에 없다.

간단하게 소주 한 병과 삼겹살 2인분을 주문한다.

주문을 받자마자 주방으로 들어가신 사장님이

곧 연두부와 콩나물 무침, 양파 절임을

소주 한 병과 함께 상위에 놓아주신다.


별말 없이 서로의 잔을 채운 뒤 곧바로 잔을 비운다.

비운 잔을 내려놓고 콩나물 몇 가닥을 집으려는 데,

G가 다시 자기 잔을 채운다.

콩나물을 집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G의 손에서

소주병을 뺏어 들고 G의 잔과 내 잔을 다시 채운다.

채운 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가 깨끗이 비워버린다.

그렇게 안주도 없이 소주 한 병을 거의 다 비울 무렵,

주인아주머니는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려 주신다.

좀 빨리 갖다 주시지…


노릇하게 잘 익은 고기는 거의 먹지도 않고

연신 술잔만 비우는 G를 보며

말없이 잔을 채워주고,

같이 잔을 비워준다.

고기를 굽던 집게를 들어 슬며시 다 익은 고기를

G 쪽으로 가져다 놓지만, 거의 손을 대지 않는

G를 보며 결국 한 소리 한다.


“삼겹살 잘 굽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지금!!”


그제야 씩 웃으며 앞에 놓인 젓가락을 들어

고기 한 점을 먹는 G다.


주문한 삼겹살 2인분을 건장한 남자 둘이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겨둔 채

소주만 몇 병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계산을 하려는 나를 제지하며

G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낸다.

잠시 후 다른 카드를 꺼내고,

세 번째 카드까지 카드리더기에서 결제가 되지 않자

그제야 민망한 듯나를 쳐다보는 G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거봐 내가 한댔잖아’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얼른 계산을 끝낸다.


부산하게 결제를 마치고 나온 성수동의 하늘에선

부슬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안 되겠다.

이런 날, 이렇게 G를 보낼 수는 없겠다.

말없이 골목 한 구석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G에게

잠시 기다리라며 골목 밖으로 나온다.


지도 앱에서 찾은 와인샵으로 달려가

두 병의 와인을 집어 든다.

그리 고가의 와인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에게 딱 좋을 그런 와인으로

두 병을 결제한다.

그리고 잠시 와인 가게 앞에 멈춰 서서

다시 지도 앱을 켠다.

몇 통의 전화 끝에 생각했던 곳을 찾고는

전화기를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고

G가 기다리고 있는 골목으로 걸어간다.


“와인 샀네? 마실 곳도 없는데 무슨 와인이야?”

“어, 형 무거운데 한 병만 들어주라.”


G의 물음을 상큼하게 무시하고

얼른 와인 한 병을 떠넘긴다.

얼떨결에 와인 한 병을 건네받은 G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해한다. 그런 G를 보며 한 번 피식 웃고는

그저 따라오라는 고개 짓을 하며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항상 사람들에게 비싼 술과 음식을 사주며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요란한 제스처로

가게 안의 시선을 집중시키던 G의 모습이 생각나

살짝 눈가가 젖어온다.

망할 부슬비가 눈가로 떨어진 모양이다.

G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어 다행이다.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뒤에서 G의 한숨소리가 들린다.

앞을 보니 지하철역 방향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곧이어 G의 실망에 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지하철 타러 가는 거였구나..”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걷던 대로 성큼성큼 계속 걸어간다.

뒤에서 G의 한숨이 몇 번 더 들려온다.


그렇게 지하철역까지 걸어와서,

역사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역을 지나치자

이번엔 G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집에 가는 거 아니었어?”


잠깐 멈춰서 뒤돌아보며

그냥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이고는

다시 성큼성큼 걸어간다.

헉헉대며 내 긴 다리를 쫓아오느라 바쁜

G의 짧은 다리가 애잔하긴 하지만,

여기서 내 서프라이즈를 망칠 순 없다.


그렇게 다시 한 참을 걸어

지도 앱에서 찾은 목적지에 도착한다.

손바닥만 한 생굴을 파는 오이스터 바.

G의 눈이 커진다.


“여기 가자고? 여기 비쌀 텐데?”


따라 들어오든 말든,

와인 한 병이 든 쇼핑백을 앞뒤로 실실 흔들며

휘적휘적 실내로 들어간다.

곧이어 따라 들어오는 G의 발소리가 들린다.


역시나 평일 낮 시간이라 손님은 우리 둘 밖에 없다.

이 시간에 영업을 하는 가게를 찾느라

전화를 몇 통을 돌렸던지…


가게에서 가장 맛있는 생굴 12피스를 주문하고,

G에게 또 한 번 눈짓을 보낸다.

못 알아듣는 G에게 괜히 눈을 한 번 흘기고,

아직 G의 손에 들려 있는

와인 한 병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낚아챈다.

그제야 ‘아..’ 하는 소리를 내는 G다.


손바닥만 한 생굴에 레몬즙과 칠리소스를 뿌리고,

한 입 가득 밀어 넣는다.

굴의 향이 날아가기 전, G가 고이고이 들고 온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밀어 넣는다.

그냥 웃음이 난다. 옆을 보니 G도 웃고 있다.

그렇게 서로 마주 보며 한참을 웃었다.


G가 운다.

와인 두 병을 사 오는 내 모습을 보고

처음에 의아했는데,

자기에게 한 병을 맡기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가길래 직감했단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와인 한 병 주고 가는구나…하고.


자기가 돈이 없으니 다른 술집에 가자는 말도

못 하겠고, 내 눈치를 보아하니 그냥 가긴 뭐 하니까

와인 한 병 던져 주고 가는 줄 알았단다.


G는 항상 돈을 썼다. 아낌없이 썼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G는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거의 매번 본인이 계산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G의 곁엔

G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만 득실거렸다.

나는 그런 G에게 몇 번 쓴소리를 해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화를 냈다.

지금 붙어 있는 사람들, 수확철 논밭 찾아 휩쓸고

다니는 메뚜기 떼들인 거 모르겠냐고.

정신 좀 차리라고.


내 독설을 듣고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담배만 물고

있던 G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외롭다고.

그런 사람들인 거 다 아는데,

외로워서 어쩔 수 없다고.


그날 이후로 나는 G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G는 여전히 그들과 어울렸다.

아주 가끔 G와 둘이 만나 빈 가게에서

와인만 한 잔 마실 뿐이었다.

가게에 대한 걱정과 어울리는 사람들에 대한

푸념이 늘어났지만,

달리 할 말이 없는 나는 그냥 듣기만 했다.

그러다 아예 완전히 가게를 접은 G에게

이제 그 누구도 옆에 있지 않는 모양이다.


다시 손바닥만 한 굴에 칠리소스와 레몬즙을 뿌려

G에게 건넨다. 좀 전까지 울던 G가 이제 웃는다.

어? 울다가 웃으면? 이라고 했더니 더 크게 웃는다.

이것 참…

그리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혼자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 둔 말이

어찌나 많았던지 와인 한 병을 이렇게 오래 마셔

본 적이 없을 정도다.


그리움의 과거,

막막함의 현재,

두려움의 미래가 뒤 섞여 나온다.


말없이,

잔이 빌 때마다 잔을 채워주고

가만히 듣고만 있다.

오늘은 G의 얘길 듣는 날이다.

가만히 들어주고,

한 번씩 조용히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그렇게 화이트 와인 한 병이 끝이 났고,

혼자 너무 많은 얘기를 한 걸 그제야 깨달은 G가

머쓱해한다.

아니 뭐 그렇다고 그만할 것도 아니면서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트러플감자튀김을 추가로 주문하고,

이번엔 내가 들고 온 쇼핑백에서

와인을 한 병 꺼낸다.

기분 좋게 부드러운 레드다.

트러플 감자튀김의 향긋한 냄새가 가게 안을 채운다.

레드 와인 한 모금에 감자튀김 하나.

딱 적당하다.

언제 머쓱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다시 말을 이어 나가는 G를 보고 웃음이 난다.

그렇게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과장된 제스처가 늘어나더니,

드디어 본래의 G로 돌아온다.


말하느라 정신이 없어

자기 잔이 비어 있는 줄도 모르고

입으로 가져가는 G의 잔을 빼앗듯이 가져와

와인 병을 들어 잔을 채워준다.

비어 있는 내 잔도 채우고,

같이 한 모금을 마신다.

잔을 내려놓고,

다음 동작을 자동으로 수행한다.


레드 와인 한 모금에 감자튀김 하나.

딱 적당하다.



* 본 문에 생굴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가볍게

즐기실 수 있는 소비뇽블랑 3종을 소개드립니다.

(생 굴에 어울리는 화이트 와인은 산미가 있는

소비뇽블랑을 주로 페어링 합니다.)


- 배비치(BABICH) 블랙라벨 말보로 소비뇽블랑

- 푸나무(POUNAMU) 소비뇽블랑

- 러시안잭(RUSSIAN JACK) 소비뇽블랑


세 종류 모두 뉴질랜드 말보로 지역의

소비뇽블랑입니다.

원래 소비뇽블랑은 프랑스에서 재배해서 생산하기

시작한 와인 품종입니다.

지금은 칠레, 남아프리카공화국, 미국 등

다른 국가들에서도 많이 생산하고 있지만,

뉴질랜드 말보로 지역이 가성비 좋은 소비뇽블랑

생산지로 특히 유명합니다.

늘 ‘와겔지수’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우리에게

아주 훌륭한 생산지이니 꼭 기억하시길.


두 번째 리스트에 있는 ‘푸나무’의 경우 발음이

한국어 나무를 뜻하는 것 같아 재밌는데,

마오리족어로 ‘초록색 돌’이라는 뜻입니다.

와이너리가 위치한 뉴질랜드 남섬 말보로 지역

근처에 비취(옥) 산지가 있어 거기서 따온

이름이라고 합니다.


소비뇽블랑의 특성상 당도가 낮고,

산미가 높은 편이며 세 종 모두 알코올이 튀지 않아

취향을 거의 타지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자몽, 레몬류의 시트러스 향과

풀향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3종류의 소비뇽블랑을

드셔보시면서 어떤 향과 맛이 나는지,

3종이 어떻게 조금씩 다른지,

나에게는 어떤 소비뇽블랑이 더 맞는지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스크류타입의 마개라 와인오프너가 필요 없습니다.

야외에서도 편하게 마실 수 있는

가성비 와인들입니다.

세 종 모두 편의점, 마트, 와인샵에서 두루 쉽게

접할 수 있으며, 가격대도 비슷한 수준입니다.

행사가 1만 원 후반 대~2만 원 초반대,

상시가 2만 원 중후반대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3만 원대로 판매하는 곳들도 있는데,

2만 원 중반 언더로 구매하시길 권해드립니다.


해산물이나 샐러드, 치즈와 잘 어울리는 편이지만

저는 육류와도 즐겨 마십니다.

특히 치킨과 너무 좋습니다. 이러니 살이…흠


마시기 전, 꼭 차갑게 칠링해서 드시길 강제 권유

드립니다. 화이트와인의 생명은 차가운 온도인데,

특히 소비뇽블랑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칠링 바스켓이 없다구요?

각얼음이 너무 많이 필요해서 귀찮다구요?

하아…세련된 버킷에 사그락거리는 각 얼음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저희 집 냉동실에는 마트에서 받아온 아이스팩이

산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라, 저는 주로 큰 냄비에

물 받아서 아이스팩 몇 개 집어넣고 거기에

와인 병을 넣어두고 먹습니다. 이제 해결됐나요?


그럼 오늘도 당신의 행복한 와인 생활을 기원하며

이만.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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