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2
“어, 미안 잠깐만!”
맞은편에 앉아 한참을 혼자 신나서 얘기 중이던
사람이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더니 팔을 들어
나에게 손바닥을 내어 보인다.
뭐지 아이언맨인가. 맞고 쓰러지는 척을 해야 하나. 1초 동안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는데,
내민 손바닥을 테이블로 내리더니 핸드폰을
집어 든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전화기가
참 지랄 방정맞게도 떨어댄다.
“어, 여보세요! 아 그럼 괜찮지! 하하. 무슨 일이야?”
심하게 과장된 웃음을 섞어 상대방과 몇 마디
주고받는가 싶더니 이내 전화를 끊고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 미안미안. 아는 동생인데,
이번에 사무실 오픈했는데 한 번 놀러 오라고 하네.
어찌나 찾는 데들이 많은지 어휴.
참 너 무슨 얘기하고 있었지? 하도 연락이 많이 와서
정신이 없다 요즘 하하”
얘기는 당신이 하고 있었고, 나는 당신 때문에
더 정신이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뭐 별 말 없었단 뜻으로 고개만 몇 번 흔드는 것으로
퉁 친다. 답답한 마음에 앞에 있는 커피를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켠다.
… 뜨겁다. 아, 뜨거운 아메리카노 시켰었지…젠장.
전화를 끊은 그는 다시 자기 자랑과 주변 인맥들의
자랑을 치킨 반, 후라이드 반처럼 반반 골고루 섞어
한참을 떠들어댄다.
듣는 사람이 진이 다 빠질 정도로 열변을 토하더니
목이 타는지 마지막 자랑을 급하게 마무리 짓고는
앞에 놓인 딸기라떼를 쪼옥쪽 종이 빨대로 흡입하기
시작한다.
쪼옥 몇 번에 투명한 유리잔에 담겨 있던
딸기라떼의 수위가 급격히 내려가기 시작한다.
와 종이빨대로 저러기 쉽지 않은데…
엄청난 흡입력이다.
자주 만날 일은 없지만,
어쩌다 한 번 갖은 이유로 만나게 되면
그렇게 있는 자랑, 없는 자랑 다 끄집어내어
열변을 토해내는 사람이 커피 한 잔을 자기 돈으로
산 적이 없다. 정말 단, 한 번도 산 적이 없다.
물론 오늘도 마찬가지다.
밥이나 먹으면서 얘기하자는 걸 카페로 데려 왔더니
케익과 빵을 밥 값만큼 시키는 치밀함을 보이며,
계산할 때가 되자 갑자기 전화가를 들고 잠시
나갔다 들어오는 민첩함도 보여준다.
이젠 그냥 애처롭다.
중요한 할 얘기가 있다고 불러 놓고,
내가 할리 만무한 프로젝트를 보여주며
프리로 기획 한 번 해보면 어떻겠냐며
특유의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물어본다.
게다가 그 프로젝트를 계획 중인 대표에게
내 얘기를 간단하게 했는데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며 같이 저녁 한 번 먹자고
한다.
‘아니 나는 그럴 생각이 1도 없어요’라는 말을
어떻게 돌려 말할까를 고민하고 있는데,
한 마디를 덧 붙인다. 그 대표, 저녁 먹을 때 돈 진짜
잘 쓴다고. 술 값 아끼지 않는다고.
아..이게 목적이었구나.
남의 돈으로 진탕 한 번 놀고 싶었구나.
하아… 사람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는 건 참
오랜만이다.
엮여 있는 지인이 몇 있어 그들의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알고 지내는
사람인데, 이제 이 짓도 그만둬야겠다.
이쯤 했으면 그들에게도 의리를 지킬 만큼
지킨 것 같다.
대충 이야기를 끝내고 일어설 기미를 보이니
술이나 한 잔 하자고 한다.
선약이 있다는 핑계를 대자 잔뜩 기대하던 표정이
급 아쉬움으로 뒤덮이더니 자기는 좀 더 있다
가겠다고 한다. 그럼요, 테이블에 케익과 빵들이
아직 잔뜩 남아 있는데, 그러셔야죠.
집으로 가는 길에 핸드폰을 들어 주소록을 연다.
그동안 몇 번이고 거르려고 했으나 엮여 있는
지인들 생각에 차마 거르지 못했던 그의 연락처를
찾아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 멈춘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는데 이 사람이면
그게 더 싫을 것 같다.
주소록은 그대로 두고 카톡을 연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친구목록에서 지운다.
그렇게 카톡 친구 목록이 한결 가벼워진다.
주머니가 가벼워지는 건 싫지만,
친구 목록이 가벼워지는 건 좋다.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로, 그리고 집중해야 하는
사람들로 점점 추려지고 있다는 뜻이니까.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 스토리 시즌2.
걸러야 될 인연을 너무 늦게 걸렀던 하루를
수다의 소재로 제15화, 시작.
제15화. 이불킥의 흑역사도 걸러지나요?
한 때 카톡 친구 목록에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몇 백 명을 넘었던 때도 있었다. 대충 500명은
가뿐히 넘겼던 것 같다.
이래저래 이직을 좀 많이 하다 보니 다녔거나
다니고 있는 회사 사람들만 해도 그 수가 적지
않았고, 또 업 자체가 여러 회사,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접하는 일이다 보니 목록의 숫자는
내가 출근하는 날들에 비례해서 나날이 커져갔다.
술을 좋아하고 술자리를 좋아하다 보니
우연히 술자리를 같이 한 회사 선배의 친구들도
목록에 들어오고, 에이전시 대표의 친구들도
목록으로 들어왔다.
아는 형님의 아는 누나의 아는 삼촌의 아는 형님의
아는 고모의 아는 친구까지 모조리 친구 목록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산처럼 쌓인 친구 목록이 한 때는 내가
가진 최고의 재산인 줄 알았다.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친구 목록을 보며 인맥의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평생을 함께 가자며 에이전시의 사람들이 줄을 섰고
술 값을 뿌리고 다닌 테이블마다 베스트 프렌드들로
넘쳐났다.
계절 한 번 바뀌면 사라질 인연들인 줄 모르고
열심히 명함을 교환하고, 선대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양 경조사에 참석하고, 도원결의를 하듯
술잔을 부딪쳤다.
수많은 시절 인연들이 흘러넘치던 시절이었다.
지금 보면 물에 빠뜨린 솜사탕보다 허무하게
사라져 가는 인연들이었건만 그때는 그 사람들이
다 내 사람들인 줄 알았다.
어리고, 어리석었고.
순수하고, 순진했다.
허상의 산을 쌓느라
진정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들여야 될
진짜 내 사람들에게 소홀했다.
그리고 그걸 깨닫았을 땐,
이미 비싼 대가를 치른 후였다.
지금 내 카톡 친구 목록에 있는 사람들은
50명이 채 안된다. 40명은 되려나.
틈 날 때마다 거르고 걸렀더니 신기하고 허망하게도
목록의 수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걸러졌다.
와인 용어 중에 ‘디캔팅(decanting)’이라고 있다.
와인병에 담긴 와인을 다른 병으로 옮기는 걸
말한다.
*Decant: (특히 와인을 한 용기에서 다른 용기에) 붓다[옮기다] _출처, 네이버 영어사전
왜 자기 병에 얌전히 잘 있는 와인을 굳이 일부러
다른 병으로 옮기는 걸까.
병입 한 지 오래된 와인의 경우 포도찌꺼기 등의
침전물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와인들을
마시기 전에 미리 침전물을 걸러주는 것이다.
물론 오래된 와인뿐만 아니라 어린 와인들도
종종 ‘디캔팅’을 하기도 한다.
‘디캔팅’ 자체가 와인을 산소와 접하게 해주는
‘브리딩’의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와인은 눕혀서 보관하지만,
디캔팅이 필요한 와인의 경우 마시기 전에 미리
한두 시간 정도는 바로 세워 둔다.
포도찌꺼기 등의 침전물을 병의 바닥에 가라앉혀
‘디캔팅’을 좀 더 쉽게 하기 위함이다.
와인을 마시다 보면, 잔을 비웠는데 잔 밑부분에
포도 찌꺼기 같은 침전물이 남아 있는 걸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처 보지 못하고 생각 없이 마시다 보면
이런 침전물들이 입안을 텁텁하게 만들며
입안을 계속 맴돈다. 디캔팅이 필요한 와인이다.
불필요한 찌꺼기는 걸러주고, 와인 본연의 풍미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와인을 중간에 방해받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인간관계에도 가끔은 이런 디캔팅이 필요해 보인다.
평온한 나의 일상을 깨뜨리는 관계가 있다면
이 관계를 굳이 계속 끌고 갈 이유가 있는지
자문해 보자.
불필요하게 감정을 소모하게 만드는 관계들이
있다면, 특히 이들이 유한한 내 시간을 좋은
먹이인양 갉아먹는 관계들이라면
이를 끝까지 안고 갈 여유가 지금 내게 있는지
진지하게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아, 물론 단점은 있다.
나는 오늘도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아무도 안 놀아주는 외로움을 이렇게 쓸데없는
글을 끄적거리는 것으로 참고 있다.
너무 많이 걸렀나… 하아.
* 디캔팅을 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테이블 위에
촛불을 켜 두고, 와인병을 들고 수평으로 눕혔을 때
와인 병의 병목 부분이 촛불 위로 올 수 있게
와인병을 잡는데서 시작합니다.
디캔터가 준비되었으면 와인병을 오픈해서 서서히
눕히며 디캔터로 와인을 옮겨 붓습니다.
이렇게 하면 와인이 병목에서 디캔터로 넘어갈 때
침전물이 섞여 들어가는지 육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병목에서 침전물이 보이면 와인병을 다시 잠시 세워
두었다가 디캔팅을 이어갑니다.
디캔팅의 영역도 브리딩의 영역과 비슷해서 파고
들어가면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오래된 와인의 경우 이미 산화가 많이
된 상태기 때문에 주둥이가 좁은 디캔터를 사용해서
산소와의 접촉을 가능한 한 줄여주는 게 필요하고,
어린 와인은 그 반대로 주둥이가 넓은 디캔터를
이용해서 브리딩의 기능을 강화하는 식입니다.
또 단순히 병의 와인을 디캔터로 옮겨 한 번에
디캔팅을 끝내는 경우가 있고, 디캔터로 옮겨
침전물을 제거한 와인을 다시 본래의 병으로 옮기는
더블디캔팅의 방법도 있습니다.
브리딩의 영역처럼 디캔딩도 와인 전문가들의
의견이 다양하게 나뉩니다. 침전물을 걸러주는
디캔팅 본연의 목적보다 브리딩의 목적을 더 크게
보는 사람들도 있고, 디캔팅으로 인해 와인의
풍미가 약화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뭐 진실은 어딘가에 있겠지만, 시즌1의 1화부터
열심히 제 글을 읽어 온 당신이라면 디캔팅에 대한
제 생각쯤은 이미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맞습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제 대답은,
‘당신이 좋으면 why not?’입니다.
특히 집에서 친구들을 불러 놓고 한 잔 할 때,
와인 병을 잡고 유리로 된 디캔터에 진지하게
와인을 들이붓는 모습을 통해 전문가스러운 포스를
보여 줄 수도 있고, 그 모습을 보는 친구들은 와인
전문가에게 대접받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퍼포먼스라 생각합니다.
거를 침전물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병을 옮기는 과정에서 브리딩의 기능을 하는 거라고
살짝 무심하게 던지듯 한마디 하시면 됩니다.
‘무심하게 던지듯’이 포인트입니다.
물론 당신이 디캔팅에 익숙하지 않다면,
테이블에 와인이 튀고, 병 옮기다 디캔터 깨 먹고…
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니, 미리 몇 번 연습해 보시고
실전에서 시도하시길 당부드립니다.
그렇다면 침전물을 제거하는 기능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디캔팅이 맛의 영역에서도 꼭 필요한
과정이냐고, 셋 셀 동안 대답하지 않으면
구독과 좋아요를 취소하겠다고 진지하게 협박
물어보신다면, 제 대답은 맛의 영역에서는
‘글쎄요’입니다.
물론 예전에는 몇 종류의 디캔터를 사보기도 하고,
오래된 와인이든 어린 와인이든 가리지 않고 마시기
전에 무조건 디캔팅을 할 때도 있었지만…
맛의 영역에서 보자면, 다 부질없습니다.
거의 무관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술을 이렇게 마시기
시작하면, 술맛이 갈수록 점점 떨어지는 신기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늘 얘기하지만 와인의 본질은 술입니다.
기분 좋자고 마시는 술에 너무 많은 의미와 과정을
부여하면, 나중엔 그냥 손이 자동으로 소주와
맥주로 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침전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병에 남은
마지막 반잔 정도는 마시지 않는 걸로 디캔팅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당신의 재미와 행복한 와인
생활에 도움이 되는 선에서 브리딩이나 디캔팅과
같은 과정들을 즐기시 길 바랍니다.
그리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과정들로 와인의
풍미가 드라마틱하게 변할 거라는 맹목적인 과신과
지나친 집착은 절대 금물입니다.
우리… 즐겁고 행복한 와인생활 오래오래 같이
해 먹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럼 당신의 굳은 약속을 믿고 오늘은 이만.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