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2
세 명의 동거인이 모두 다 같이 늦잠을 자고 일어난
어느 한적한 일요일 아침.
알차게 빈둥거리다 느지막이 아침을 차려 먹고
각자 멍하니 앉아 있다.
잠시 후 한 명은 소파에 앉아 유튜브를 연결해 놓은
텔레비전을 시청 중이고, 다른 한 명은 핸드폰을
대충대충 넘겨 보고 있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그런 두 명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다.
입을 헤벌쭉 벌리고 짧은 영상에 빠져 있는 초딩
동거인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죄책감이 몰려 든다.
안 되겠다.
이 날씨에 이 휴일에, 집에 하나뿐인 초딩을
이렇게 유튜브나 보게 둘 순 없지.
물론 본인은 그게 제일 신나겠지만.
어쩌랴, 오늘 너에겐 선택권이 없다.
저녁에 해야 할 숙제까지 미리 다 끝내고,
집을 나선다. 오늘의 목적지는 바로!
박물관이다. 박물관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이다.
집에서 유튜브 보는 게 더 재밌다며 옆에서 입을
삐죽거려 보는 초딩이지만, 앞서 말했듯이 오늘의
너에겐 선택권이 없단다.
인생이 모두 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란 사실에
너도 이제 익숙해져야지.
그래도 저녁 숙제까지 다하고 따라나선 녀석의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론 안쓰러운
마음도 들어 많이는 보지 말고 딱 한 시간만
재밌게 보고 나와서 맛있는 거 사 먹고 오자고 하니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래, 넌 잘 때가 웃을 때가 제일 예뻐.
항상 그렇게 자주, 활짝 웃으렴.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익숙해지는 거다.
오늘은 삼국시대만 대충 훑어보자.
그중 너의 마음에 드는 나라를 하나 정해 다음에
다시 와서 그 나라만 조금 더 자세히 보기로 하자.
그리고 그때 그 나라의 유물들 중에 네 마음을 끄는
유물이 있으면 또 다음에 와서는 그 유물들 몇 개만
다시 보고 가자.
유물 한 점, 한 점이 사연이 없는 유물이 없건만,
한 나라의 중앙 박물관을 하루에,
그것도 몇 시간 안에 다 본다는 건 어른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니, 이렇게 조금씩 마음속에 흘려
넣어 보자.
아직은 많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겠지만 이렇게
조금씩 익숙해져 보자. 그러다 보면 박물관이 주는
즐거움에 눈을 뜨게 될 날이 올 테니.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와인 스토리 시즌2.
한적한 어느 일요일 오후의 박물관 산책을
수다의 소재로 제14화, 시작.
제14화. 박물관과 붕어빵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박물관 산책이다.
나는 박물관, 미술관, 전시관 뭐 비슷한 모든 관들을
다 포괄하여 박물관으로 통칭하는데,
이런 관들이 주는 느낌이 너무 좋다.
그냥 그 주변을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역사나 예술을 전공한 것도 아니건만,
그래서 그 분야들에 엄청난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박물관이 주는 감정들을 나는 몹시
사랑한다.
거기에는,
애틋함이 있고 그리움도 있으며,
애절함이 있고 외로움도 있다.
애태움이 있고 무정함도 있으며,
웅장함이 있고 소박함도 있다.
용맹함이 있고 비굴함도 있으며,
풍요로움이 있고 빈곤함도 있다.
사방 천지 고요함을 느낄 때도 있고,
천둥 같은 커다란 함성이 들릴 때도 있다.
이렇게 내게 있어 박물관은 단순히 과거 유물이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물리적 전시 공간이 아닌,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람이 느끼고 쌓아온
감정의 보관소로 다가온다.
걸려 있는 의복에서 그 시대를 살던 이들의 대화가
들려오고, 전시되어 있는 갑옷에서 빗발치는
화살들과 씩씩거리는 말들의 투레질 소리가
들려온다. 왕의 금관에서는 정점에 선 자의 고뇌가
느껴지고 여인들의 장신구에서는 곱게 장식하고
밖을 나서는 그녀들의 용무가 궁금해진다.
이들은 천 년의 세월을 훌쩍 넘은 후에 누군가가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릴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겠지.
복잡한 문제로 머릿속 생각들이 엉켜 있어
풀 엄두조차 나지 않을 때면,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이 제격이다.
2년 전 새롭게 단장한 사유의 방에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았던 반가사유상 2점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인 2점의 반가사유상은
‘사유의 방’이 만들어지기 전까진 동시에 함께
전시된 적이 거의 없다.
한 점이 전시되는 동안 다른 한 점은 보존 처리나
연구 목적으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사유의 방’이 만들어지면서
2점의 반가사유상을 같은 자리에서 함께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 분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건지 모르지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와 감사함을 보낸다.
어둡고 긴 복도를 지나 들어가면
광활한 전시 공간에 두 점의 반가사유상이
고요하게 머물고 있다.
전시되어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지배적이다.
특히, 평일 한적한 시간대에 방문하게 되면
이 넓은 ‘사유(思惟)의 방’을
혼자 사유(私有)하게 되는
극도의 사치를 누릴 때가 있는데 그때 받는 느낌은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다른 방문객이 오기 전까지 무상의 시간을 보내다
다른 방문객들이 들어오는 약간의 소란스러움에
정신을 차린다.
다시 긴 복도를 지나 사유의 방을 나오면 복잡했던
머릿속에 한 줄기 여유가 비집고 들어온다.
너무 복잡한 문제는 때론 풀지 않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
어느 한적한 일요일 오후,
두 명의 동거인들과 함께한 박물관 산책은
꽤나 성공적이다.
즐겁게(중간에 몇 번 시간을 물어본 건, 정말 시간이
궁금해서였던 거겠지.) 박물관 산책을 마치고
나오는 길은 들어갈 때보다 더 기분이 상쾌하다.
하늘은 왠지 더 맑아 보이고, 나무들은 더 싱그러워
보인다.
현재와 단절된 공간에 머물다 다시 현재로 나오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 갔다 온
기분이다. 너무 신난다.
내가 이래서 박물관을 끊을 수가 없다니까!
그렇게 상쾌한 기분으로 박물관을 나온 뒤,
무슨 맛있는 걸 사 먹을까 고민을 하며 걸어가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참을 수 없는 맛있는 냄새가
주변을 휘돈다.
냄새의 근원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니 바로 코앞에
범인이 있다. 붕어빵 굽는 할머니다.
세 명의 동거인들이 서로 눈 빛을 교환한다.
그렇게 몇 번의 눈 빛이 오고 간 뒤, 동시에 외친다.
“우리 붕어빵 먹자!”
비상시를 대비해 만 원짜리 한 장을 카드 지갑에
고이 간직해 둔 나 자신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몇 번이고 생색을 냈더니, 동거인 한 명이 조용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손가락의 끝을 따라가 보니 기둥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찢겨진 고구마 박스의 일부분이 보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대충 매직으로 휘갈겨 쓴 글자와
숫자들이 산들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계좌이체 됩니다. **은행, 007-0-으악-007-0-으악’
더 이상의 생색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런 낭만이 없는 시대 같으니라고.
현장에서의 긴급 간이 가족회의 끝에
팥붕 반, 슈붕 반으로 주문하기로 한다.
슈붕을 더 많이 주문하고 싶었지만,
민주주의는 이런 게 안 좋다.
아차차,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게 무심코 이 말을
밖으로 내뱉었나 보다.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민주주의에 고마워하라고. 아니었으면
전부 팥붕이었을 거라고.
목소리의 주인공에게서 뭔가 민주적을 가장한
독재자의 느낌이 들지만, 더 이상 따지고 들진 말자.
어휴 추워. 갑자기 웬 바람이 이렇게…
어서 받아서 가기로 하자.
그렇게 박물관 산책길에 우연히 발견한 붕어빵은
'2023년 올해의 첫 붕어빵' 타이틀을 차지하였고,
더 중요한 건 이 붕어빵이 지금까지 먹어 본
붕어빵 중 단연 최고라는 사실이다.
당분간 깨지기 힘들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붕어빵 틀을 벗어난 부위에 붙어 있는
바삭한 과자 부위까지 환상적인 맛을 보여준다.
특히 슈붕은, 아 정말 이건 말로 설명하고 싶지가
않다. 적절하게 잘 구워진 머리, 몸통, 꼬리와
그 속에 따뜻하게 녹아 있는 바나나 우유 맛의
슈크림! 정말이지 최고다.
근처 커피가게에서 주문한 음료와 함께 붕어빵을
다 먹고 나온 우리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다시 붕어빵 할머니가 있는 곳을 향한다.
주머니에 넣어 둔 천 원짜리 몇 장과 한 봉지의
붕어빵을 다시 교환하며 모처럼 제대로 된 교환비의
희열을 느낀다.
이날 저녁 세상 진지한 표정의 세 사람이
주방 식탁 의자에 앉아 있다.
그런 그들의 앞에는 고소한 냄새를 물씬 풍기는
볼록한 종이봉투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현장에서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온,
추가로 산 붕어빵을 나누는 경건하고 엄숙한 자리다.
여러 의견들이 치열하게 오고 간다.
때론 목소리가 높아지고, 때론 손짓 발짓까지
튀어나오며 협상은 과열되어 간다.
그렇게 과열된 협상에 지쳐 잠시 두 명의 동거인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이때다. 이때를 공략해야 한다.
그동안 입 밖으로 내뱉고 싶어 근질근질했지만
끝내 참고 버텼던 마지막 무기를 드디어 꺼낸다.
각자의 몸무게를 근거로 배분해야 한다는,
칸트도 울고 갈 나의 탁월한 논리력에
다들 할 말을 잃은 표정이다.
그렇게 붕어빵의 절반은 내 차지가 되었고,
모두가 잠든 밤 달달한 모스카토 한 병을 꺼내
낮 보다 더 맛있게 내게 주어진 절반의 슈붕을
느긋하게 해치운다.
그래, 이 맛이지.
한적한 어느 일요일 오후의 박물관 산책에서 만난
인생 최고의 슈붕은 이렇게 초딩 동거인에게는
박물관을 다시 찾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었고,
나에게는 달달한 모스카토에 어울리는
새로운 안주를 하나 더 찾아 주었다.
역시, 박물관이다.
* 붕어빵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당신은 머리와 꼬리 중 어느 부위를 가장 먼저 먹는
타입인가요?
부드럽고 살이 많은 머리 먼저?
바삭하지만 속은 부드러운 꼬리 먼저?
뭐 어디를 먼저 먹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맛있으면 그만이지. 하하.
하지만 저는 옆구리를 가장 먼저 베어 먹습니다.
거기가 크림이 가장 많거든욧!
* 붕어빵은 해산물이니 화이트가 어울리고,
특히 슈붕은 달달하니 화이트 중에서도
달달한 모스카토가 제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모스카토 한 종 소개드립니다.
모스카토는 'Muscat'이라는 화이트 와인 품종의
이탈리아 이름입니다.
모스카토 중에서는 이탈리아 북부의
아스티(Asti) 지방이 유명한데,
그래서 와인샵에서 모스카토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이런 이름의 모스카토를 많이들 추천해 주십니다.
한 번쯤 들어 보신 분들도 있으실 텐데 바로
‘모스카토 다스티’입니다. ‘Moscato ’dAsti’,
'아스티 지역의 모스카토'라는 굉장히 심플한
의미입니다.
대부분 와인들이 이런 식입니다.
어려울 게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이런 거 몰라도 당신과 나, 우리의 행복한
와인 생활엔 전혀 지장이 없으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시길. 그러다 보면 나중엔 그냥
대충 알아듣게 될 일입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모스카토 와인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지방의 ‘골든버블’입니다.
풀 네임은 ‘카를로 펠레그리노, 골든버블 모스카토
(Carlo Pellegrino, Golden Bubbles Moscato)’
로, 이름 앞의 ‘카를로 펠레그리노’는 시칠리아의
유명 와이너리 이름입니다.
약간의 탄산과 모스카토 특유의 달콤한 맛이
지배적이고, 때론 약간의 새콤함도 느끼실 수가
있습니다.
‘골든버블’은 보통 만원 언저리에서 쉽게
구매하실 수 있는 가성비 좋은 모스카토 와인이며,
알코올 도수도 7%로 일반적인 레드나 화이트
와인에 비해 매우 낮습니다. (‘모스카토다스티’는
5.5도 정도로 알코올 도수가 더 낮습니다.
그래서 단 맛이 더 강합니다. 왜 도수가 낮은데
단 맛이 더 강하냐고 물으신다면…
'모스카토다스티’는 5.5도가 넘어가면 알코올
발효를 인위적으로 멈추기 때문인데, 그러면 남은
당분들이 더 많아져서…이젠 이런 설명들이 나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너무 잘 알고들 계시죠?
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세요.
머릿속에 가둬 두면 해롭습니다. )
그래서 저는 주로 가족 모임이 있을 때 한 병씩
가져가서 기분을 내곤 합니다.
술을 거의 못 드시는 저희 엄마도 굉장히 좋아하는 와인입니다.
모두가 다 같이 즐거운 시간,
‘쨍’ 하는 한 잔의 건배가 필요한 장소에 부담 없이
한 병 준비해 가기에 좋은 와인입니다.
그럼 오늘도 당신의 행복한 와인 생활을 기원드리며
, 이만.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