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라면과 족발의 공통점

와인 한 스푼, 수다 세 스푼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2

by 박나비

“어디~보자~이거엇~들은~한데~모아~담아~놓고,

어디~보자~ 저거엇~들은~박스 큰 게~필요~하네~

박스~큰 게~어디~있나~예 있던가~쟤 있던가~

모르겠다~박~스가~다 어디로~가있~느냐~

없어도~그 마안~있으면~조옿지~!”


이 소리는 XX세의 박나비옹이 베란다에서 맨발로

쭈그리고 앉아 분리수거를 하는 소리입니다.

잊혀져 가는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일상 와인 캠페인과 함께합니다.


매주 수요일은 아파트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다.

플라스틱, 종이, 스티로폼, 유리병… 유리병!

꽤 장시간 쭈그리고 앉아있다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살짝 어지럽다. 이런 병약한 소년같으니…

후우~ 지금 생각났으니 급할 건 없다.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움직이자.


옷방 겸 책방으로 쓰는 방으로 가서 옷장의

제일 왼쪽 문을 연다. 옷장 하단에 빈 와인병 네 병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아무도 없는 집이건만 누가

볼세라 주변을 한 번 슬쩍 둘러보고는 한쪽 손에

두 병씩 공평하게 빈병을 챙겨 들고 휘적휘적

작업장으로 돌아온다.


“유리~병은~저~쪽에~ 크~은~봉투~하나 빼서~”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드는 어느 수요일 오전

서울 모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우리 가락, 우리 소리

구성진 노동요가 다시 이어진다.


‘와인의 세계에 이제 막 발을 내딛으려는

당신을 위한 고품격 와인 스토리’라고 쓰고,

‘와인 한 스푼에 수다 세 스푼의 믹스커피 같은

와인 이야기’라고 읽는 일상 와인 스토리 시즌2.


"어디~보자 이 버언~화가, 몇 화~인고 세어~보니~"

구성진 분리수거 노동요를 부르며 힘차게

제16화 시작.




제16화. 생라면과 족발의 공통점


“현관 도어락 소리가 안 나네?”

외출 후 돌아온 같이 사는 분이 현관 도어락에서

평소와 다름을 느끼고 한 마디 한다.


“아, 그거… 숫자 누를 때마다 소리 나는 것도,

비밀번호가 몇 자리인지 특정될 수 있어서

소리 없는 게 보안에 좋다더라고.”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일단 답을 하고 본다.


“아, 그래? 근데 번호 누를 때 소리 안 나는 건

괜찮은데, 문 열고 닫을 때도 아무 소리가 안 나니까

뭔가 좀 허전하네.”


번호를 터치할 때마다 나던 ‘삑’ 소리와,

문을 열고 닫을 때 나던 ‘띠리리(→↗↗)’ 소리가

모두 나지 않으니 나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지만

곧 적응될 거라 얼버무리며 도어락 대화를

서둘러 끝낸다.

본 목적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다행이다.


국민 초등학교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시간은

모두가 잠든 밤 시간이었다.

3층 다락방을 내 방으로 쓰던 그때,

모두가 잠든 밤이면 살며시 방 문을 열고 나와

문에 몸을 기대고 잠시 기다린다.

이윽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족들 누구도 깨지 않도록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살금살금 거실로 내려가보지만,

늘 첫 스텝에서부터 실패다.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삐걱’하고 한 밤중

나무 계단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아무리 경험이

쌓여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내적으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아찔함을

느끼며, 외적으로는 발을 내디딘 계단에 급하게

쭈그리고 앉아 잠시 주변의 동태를 살핀다.


그렇게 한 계단 한 계단을 가슴 졸이며 조심스레

발을 내디뎌 보지만, 첫 계단부터 마지막 계단까지

한 계단도 빠짐없이 삐걱 대는 바람에 내 심장은

발바닥까지 떨어졌다 머리끝까지 튀어 올라오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나무 계단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2층 거실로 내려오면, 계단에서 우측에 위치한

주방을 향해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간다.


주방에 도착해서 안쪽 다용도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제야 좀 안심이 된다.

참고 있던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선 라면을

넣어둔 서랍을 열어 한 봉지 꺼낸다.

이때 라면은 안성탕면일 때도 있고,

삼양라면일 때도 있다. 너구리일 때도 있고,

짜파게티일 때도 있다.

그 주에 엄마가 어떤 라면을 사두었냐에 따라 다르다.


꺼내온 라면을 잠시 식탁 위에 내려두고 이번엔

냉장고 문을 연다. 1000밀리짜리 큰 우유통을

꺼내 한 컵 가득 담고 다시 제자리에 넣어둔다.


자, 이제 온대로만 다시 가면 된다.

물론 난이도는 조금 더 높다. 라면 한 봉지와

우유 한 컵이 추가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힘겹게 3층 다락방으로의 야식 운반이 끝나면

이제 행복한 시간을 누릴 차례다.

따뜻한 이불속에 잘 자리 잡고 엎드린다.

두 눈은 책에 고정한 채, 왼손으론 다 읽은 책장을

넘기고 오른손으론 작게 부셔 놓은 생라면을

오도독오도독 부셔 먹기에 최적화된 자세다.


한 번에 스프를 너무 많이 찍어 그 오묘한 맛의

균형을 잃거나, 한 입에 너무 큰 덩어리를 넣어

목이 막힐 때면 옆에 놓인 우유를 한 모금 마신다.


겨울에는 이 메뉴에 귤 몇 개가 추가되기도 한다.

아, 이때는 라면 따로 귤 따로 먹는 것이 아니라,

생라면에 스프를 찍어 귤 몇 쪽과 함께 먹는다.

어? 그렇게 인상 찌푸리지 마시고 다음에 한 번

도전해 보시길. 이거 의외로 맛있다.

큰 마음먹고 먹어봤는데 맛없으면 어쩔 거냐고?


뭐, 그럼... 어쩔 수 없다. 그저 내 취향인 걸로.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이제 그 뒤처리가 중요하다.

반쯤 남은 스프봉지를 잘 구겨서 라면 봉지에

집어넣고는 라면 봉지를 작은 딱지 크기로 접는다.

자, 여기까지 너무 잘해놓고 사소한 실수로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바로 휴지통에 버리는 방법이다.

휴지통을 열고 아무 생각 없이 바로 버리면 절대로

안된다. 아침에 엄마가 휴지통을 열었는데, 바로

위에 곱게 딱지 모양으로 접혀 있는 라면 봉지가

보이면 이 모든 게 다 허사다.

휴지통 안쪽으로, 열었을 때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쑤셔 넣어야 비로소 모든 과정이 끝난다.

한밤의 야식 작전 대성공이다.


그 후로 강산이 여러 번 변할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한밤중에 당당하게 라면을 끓여 먹어도

되는 나이가 되었…

는 줄 알았지만 하아…


딱 필이 오는 밤이다.

서양 판타지의 세계관을 확립한

J.R.R톨킨 선생님에 필적하는, 동양의 자랑!

무협계의 시조이신 김용 선생님의 위대한 작품

한 편을 펼쳐 놓고 여유롭게 레드 와인 한 잔 하면

딱 좋을 것 같은 그런 필이 오는 밤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틀 전 저녁으로 소고기를 구워

먹으며,

‘소고기에는~말벡이지요~말벡 하면~칠레지~’라고

우리 집 초딩이 유치원 때 부르던 '꼭꼭 약속해'를

번안해 부르는 오두방정을 떨며 한 잔 했다는

사실이다.

이 상황에서 오늘 또 한 잔 하겠다고 노래를 부르면

같이 사는 분의 싸늘한 시선이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팍팍 꽂힐 건 당연지사. 명약관화. 불문가지.

안 봐도 비디오...


이럴 땐 어쩔 수 없다.

슬슬 곁에 있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펴본다.

오호라, 좀 있으면 곧 자러 갈 분위기다.

오늘은 초딩이 엄마와 함께 자는 날이니,

이제 두 사람이 자러 가기만을 기다리자.


절대 그 어떤 티를 내어서도 안된다.

무의식 중에 신나는 휘파람이라도 불었다간

바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수 있으니, 지루하다고

멍 때리고 있으면 안 된다.

이때 가장 좋은 건 배달 업체를 찾아보는 것이다.

마치 심각한 뉴스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표정 관리를 하면서 와인과 페어링 할

오늘의 음식을 골라 본다.


이틀 전에 소고기를 먹었으니, 오늘은 음…

그래 족발이 좋겠다.

족발은 전에 이 집이 맛있었는데,

뭐 이벤트 같은 건 안 하려나.

알뜰하게 쿠폰이 있는지도 살펴보고,

리뷰 이벤트가 있는지도 잘 챙겨볼 일이다.


그렇게 심각하게 핸드폰을 보고 있으면

어느순간 두 사람이 하품을 하며 방으로 들어가는

기척이 느껴진다. 이때도 중요하다. 한 박자 늦게

나도 같이 자연스레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다.


가족 간 사랑이 듬뿍 느껴지는 굿나잇 인사를

나누고 거실과 방들의 조명을 끄고 방으로 들어가자.

인사를 하는 목소리가 들떠서는 안된다.

거실 조명을 끄는 손 짓이 날아갈 듯 가벼워서도

안되고, 방으로 들어가는 나의 스텝이 춤을 추듯

경쾌해서도 안된다.

언제든 동거인들이 갑자기 뒤돌아 볼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모든 행동을 각별히 조심하자.


방으로 들어와 오늘의 김용 컬렉션을 선정해서

읽고 있다 보면 드디어 모두가 잠이 든 것 같은

확신의 느낌이 드는데, 이때가 고비다.

여기서 5분만 더 기다리자.

단 한 번의 기회임을 절대 잊어선 안된다.

5분이 지나면 이제 배달 어플을 켜고 결제를

진행한다. 이때도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요청사항에 반드시!

‘공동현관/개인현관 모두 절대로 벨을 누르지

말아주세요’ 라고 신신당부를 해두어야 한다.

꼭 '공동현관/개인현관 모두'라고 적어둬야 한다.

그냥 ‘벨은 누르지 말아 주세요’라고 하면,

배달기사님들이 개인현관벨만 안 누르면 되는 줄

아시고, 공동현관에서 우리 집을 호출하셔서

한밤의 적막한 거실에 웅장한 8비트 기계음의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려 퍼지는 대참사가

발생한다.


어떻게 아냐고? 나도 알고 싶지 않았…

아무튼, 매우 중요한 포인트니 잊지 말고

두 번 세 번 꼭 확인할 일이다.


결제가 끝나면 준비해 둔 와인을 잔에 한 잔

따라두자. 급하게 바로 꼴딱 마시진 말고,

잔과 병은 그 상태 그대로 두고 느긋하게

읽던 책을 보고 있으면 곧 배달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온다.


살며시 방문을 열고 동태를 살피자.

완벽한 타이밍이란 생각이 들면 현관으로 나가

중문을 닫아 놓자.

현관문을 열고 닫는 소리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뭐든지 다 써먹어야 한다.

이 순간을 위해 나는 오늘 낮에 도어락의 효과음을

꺼두었다.

(서두에 왜 뜬금없이 도어락 효과음에 관한 대화가

나왔겠는가. 이 글에 쓸데없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정독할 일이다.)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어 보면 문 앞에 얌전히

나의 픽업을 기다리고 있는 족발 봉지가 보인다.

비닐봉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안아서 안전하게

방으로 데려오면, 이제 행복한 시간을 즐기면 된다.


먼저 따라두었던 레드 와인 한 잔으로 입안을

적신다. 잔을 내려 두고 윤기 좌르르 족발 한 점에

리뷰이벤트를 약속하고 받은 보너스 막국수

한 젓가락을 말아 입안에 넣어보자.


이거지! 이 황홀함!

읽고 있던 김용 선생님의 컬렉션에서 소오강호의

피리소리가 들려오는듯하다.

다음 잔에선 녹정기의 주인공 위소보의 경박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그다음잔에선 사조영웅전의

강남칠괴가 통째로 빌린 객잔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래, 이 필이다.

지금까지의 수고로움이 모두 녹아내리는

만족스러운 밤이다.


만찬이 끝나면 뒤처리도 잊으면 안 된다.

음식을 담았던 용기들은 다른 재활용과 잘 뒤섞어

혹시라도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며, 빈 와인병은

옷장에 잘 숨겨두도록 하자.



수요일 아침이다.

내 전용 작업장에서 열심히 분리해 놓은

재활용품들을 한가득 짊어지고 1층으로 내려간다.

가지고 내려온 재활용품들을 종류별로 설치된

빈마대에 열심히 옮겨놓고 있는데 경비 아저씨가

지나가시며 한 마디 하신다.


“어휴 4층 아저씨, 이번주도 와인 많이 드셨나 봐요~”


아…모든 변수를 다 체크했건만…

경비 아저씨를 예상 못했다.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더니...

완벽하다 자부했건만, 아직도 나는 모자라는구나!


경비 아저씨 휴식시간이 몇 시더라.

앞으로 분리수거는 그 시간에 맞춰 내려오는걸로.



* 족발에는 정말 어떤 와인도 다 좋습니다.

집에 있는 레드 중 아무거나 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구비된 와인이 없는 상황에 대비해서,

늦은 밤 족발과 함께 마실 가성비 와인 하나

소개드립니다. 비싼 족발까지 시켰는데 와인까지

비싸면 오래오래 행복한 와인생활을 지향하는

저희 모토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소개드릴 와인은 바로,

'무초마스(MUCHO MAS)'입니다.

스페인 와인으로 단일 품종은 아니고

템프라니요에 쉬라즈가 약간 섞여 있습니다.


상시가 만원 중후반대로, 데일리 와인으로 매우

좋습니다. 상쾌한 과일향과 부드러운 바닐라향으로

목넘김이 좋습니다. 크리미한 느낌도 나며 잔당감이

있습니다. 만원 중후반대의 가격에서 이 정도

퀄리티면 매우 만족입니다.


박스로 쟁여 두시고 급 와인이 땡기실 때 뽕따로

드시기에 최고의 와인입니다.

알코올이 튀는 느낌이 드시면, 2~30분 정도만

병을 오픈해 두셨다가 드시면 됩니다.

아, 참 '무초마스'는 화이트도 무척 맛있습니다.

페어링할 음식에 따라 화이트도 한 번 드셔보시길

권유드립니다.


끝으로 너무 잦은 배달주문과 한 밤의 몰래 와인은

행복하고 원만한 가정생활의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적절하게 눈치껏, 요령껏 즐기시길

당부드립니다. 일상와인스토리에선 부부관계

상담을 해드리진 않습니다.


그럼 오늘도 당신의 행복한 와인생활을 기원드리며,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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